대만인 관광객으로 위장한 중국인 다섯 명이 설 연휴 직전 필리핀 서부 팔라완섬에서 드론(무인기)·휴대폰으로 군사기지와 해안경비함 사진을 찍고 감시 카메라까지 설치했다가 필리핀 수사 당국에 검거됐다. 지난해 한국에서도 중국인들이 드론으로 부산항에 들어온 미국 항공모함과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 청사 등을 찍은 사실이 적발돼 간첩법 개정 필요성이 제기됐는데, 같은 일이 필리핀에서도 벌어진 셈이다.

필리핀은 남중국해 스프래틀리군도(중국명 난사군도) 영유권을 놓고 2023년부터 중국과 분쟁 중이다. 필리핀 해군은 스프래틀리군도 내 ‘세컨드 토머스 암초’에 좌초시킨 폐(廢)군함 내에 수비대를 두고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팔라완섬은 이 수비대에 물품을 공급하는 해군 부대와 필리핀군 서부사령부 등이 있는 군사적 요충지다. 스프래틀리군도에서 200㎞가량 떨어져 있다.
필리핀 당국은 앞서 지난달 20일에도 필리핀 북부 루손섬 인근 군 기지와 발전소·경찰서 등 각종 기반 시설을 정찰하고 3차원 입체 영상 자료를 수집한 혐의로 중국인 덩위안칭 및 필리핀인 두 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중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곳곳에서 전방위로 첩보전을 벌인다는 증거가 드러나는 상황이다.
팔라완섬 사건은 지난달 말 필리핀 GMA 뉴스 보도로 처음 알려졌다. 이 매체가 보도한 영상엔 한 중국인이 바닷가 휴양지 부근에서 필리핀 해안경비대 선박을 촬영하는 모습이 나온다. 휴양지 내 야자나무 사이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는 장면도 있다. 드론을 이용해 팔라완섬 해군 부대와 해안경비대 선박, 공군 기지, 조선소 등을 촬영하기도 했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이들은 휴양지에 머물면서 현지 주민들에게 대만인 관광객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주민 신고를 받고 수사에 착수한 필리핀 국가수사국(NBI)과 군 당국은 1월 24~25일 마닐라 공항에서 두 명을 검거하고, 마닐라 다른 지역에서 두 명을 체포했다. 나머지 한 명은 필리핀 중부 네그로스섬에서 잡혔다. 용의자 다섯 명 중엔 필리핀에 2002년부터 거주해온 중국인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중국인들은 간첩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필리핀 수사 당국은 압수한 드론과 휴대폰에서 군사기지와 해안경비함 등을 촬영한 사진을 다수 확인했다고 밝혔다. 하이메 산티아고 국가수사국장은 기자회견에서 “용의자들이 드론으로 스프래틀리군도와 가장 가까운 큰 섬인 팔라완섬 내 군사기지와 해안경비함 등을 촬영했다”고 했다. 로미오 브라우너 필리핀 육군 참모총장은 “이 자료가 다른 나라 손에 들어가면 군사기지와 경비함에 있는 인원들이 위태로워지는 등 국가 안보에 큰 위협이 될 것으로 본다”고 했다.
필리핀 국가수사국은 앞서 지난달 20일에도 군사기지와 경찰서 등을 정찰하고 자료를 수집한 혐의로 중국인 덩위안칭과 필리핀인 두 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덩위안칭은 인민해방군 육군공정대학을 졸업한 컴퓨터 엔지니어로 5년 넘게 필리핀에 거주해 왔다고 한다.
이들은 ‘자율 주행 개발 차량’이라는 표지를 단 차량을 몰고 다니면서 각종 자료를 수집했다고 전해진다. 압수한 차량을 수색해보니 목표로 하는 기반 시설에 대한 3차원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과 위성항법장치(GPS) 등 각종 정보 수집 장비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이미 루손섬 지역은 정찰을 끝낸 상태였고 이후 중부 비사야스 제도, 남부 민다나오섬 등으로 정찰 범위를 확대할 예정이었다고 알려졌다.
덩위안칭의 휴대폰에서 한 유령회사에 정기적으로 170만~1200만페소(약 4200만~3억원)의 돈을 보낸 사실까지 포착돼 필리핀 국가수사국은 배후의 중국 간첩 조직을 확인 중이다. 이번에 발각된, 팔라완섬에서 군 기지를 촬영한 중국인들과 연락한 흔적도 나왔다. 이들이 별개가 아닌 한 그룹으로 움직였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필리핀군 당국은 덩위안칭이 필리핀 내 미군 기지를 겨냥해 간첩 활동을 했다고 보고 있다. 필리핀은 2014년 미국과 자국 군사기지에 미군 항공기와 군함 등을 배치할 수 있도록 하는 방위협력조약(EDCA)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에 근거해 미군이 사용할 수 있는 필리핀 군사기지가 첩보 수집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로미오 브라우너 육군 참모총장은 “지표물과 지형을 정리해 군사 용도로 사용하려 한 듯하다”고 했다.
루손섬 내 필리핀 공군 기지와 해군 기지 등엔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에서 일어나는 충돌 등 유사시에 대비해 미국이 중거리 미사일 발사 시스템 타이푼 포대 등을 배치해 두었다. 클라크 공군 기지엔 미 공군 스텔스 전투기 F-22가 배치된 적도 있다.
덩위안칭 사건이 드러난 직후엔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달 22일 브리핑에서 “중국은 해외 거주 국민에게 현지 법률과 법규를 준수하라고 일관되게 요구해왔다. 필리핀이 근거 없는 억측에 근거해 (검거한 이들을) 중국 간첩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행위를 멈추기를 촉구한다”고 했다. 반면 팔라완섬 사건에 대해선 아직까지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았다.
한국·필리핀 및 미국령 괌 등을 상대로 중국이 전방위 첩보전을 벌인다는 정황이 거듭 드러나자 미국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달 28일 미국의소리(VOA) 방송에 보낸 논평에서 “우리는 미 장병의 안전과 안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중국의 아·태 지역 간첩 활동을 미군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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