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대구 수성구 자택 서재에서 박정한 대구가톨릭대 의대 명예교수가 본지와 만나고 있다. 췌장암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인 그는 “제자들이 고통받는 환자를 위해 인술(仁術)을 펼치는 의사가 아니라, 이익의 경중을 따지는 단순 의료 기술자의 길로 가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했다./김동환 기자
지난 14일 대구 수성구 자택 서재에서 박정한 대구가톨릭대 의대 명예교수가 본지와 만나고 있다. 췌장암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인 그는 “제자들이 고통받는 환자를 위해 인술(仁術)을 펼치는 의사가 아니라, 이익의 경중을 따지는 단순 의료 기술자의 길로 가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했다./김동환 기자

의료계 원로 박정한(80) 대구가톨릭대 의대 명예교수는 작년 정부의 의대 증원 결정을 “비현실·비과학적 판단”이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도 “전공의·의대생은 올해 반드시 복귀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 4일 학생 복귀를 위해 내년도 의대 모집 인원을 증원 이전(3058명)으로 돌리자는 ‘의료계 원로들의 호소문’에도 이름을 올렸다.

대부분 의대는 다음 주를 수업 복귀 마지노선으로 잡고, 미복귀 시 학칙에 따라 유급·제적 등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최후 경고’를 한 상황이다. 하지만 복귀 움직임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작년 여름 췌장암 4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박 교수는 “제자들이 고통받는 환자를 위해 인술(仁術)을 펼치는 의사가 아니라, 이익의 경중을 따지는 단순 의료 기술자의 길로 가는 것은 막아야 한다”며 본지 인터뷰에 어렵게 응했다.

경북 경산 출신인 박 교수는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모자(母子)보건학을 전공하며 수련 생활을 하고 1981년 경북대 의대 교수로 부임했다. 40년 넘게 의학 교육계에 몸담으며 대구가톨릭대 의대에서 학장만 10년 넘게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작년 췌장암 판정을 받고 지역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가족들은 서울 대형 병원에 가라고 입을 모았다. 내가 대구가톨릭대병원 간담췌병원에서 치료받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수술을 깨끗하게 잘 마쳐 현재는 항암 치료 중이다.”

-지역 병원을 선택한 이유는.

“내 평생 사명이 지역 의료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서울 주요 의대 여러 곳에서 수차례 교수직을 제안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지역에 남았다. 아파서 치료를 받아보니 지역 의료의 중요성이 더 와닿는다. 격주로 4일씩 입원하는데 집에서 병원까지 30분이면 간다. 암 환자가 수시로 서울을 오갔다면 심신이 지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역 의료가 의정 갈등으로 무너질 위기다. 청년 의사들은 퍼뜩 돌아와 달라.”

췌장암 말기 투병 중인 박정한 대구가톨릭의대 석좌교수가 대구 수성구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의대생들의 복귀를 촉구했다./김동환 기자

-‘의정 갈등’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도 의료계도 학생도 도대체 우짤라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의학 교육이 단 1년만 이뤄지지 않아도 도미노처럼 전공의·전문의 배출 시스템이 무너지고, 회복하는 데 10년 걸린다. 지금도 붕괴 위기인 필수 의료와 지역 의료는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진다. 환자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이들이 우째 이러나.”

-‘의대 증원’ 정책에는 반대해 왔는데.

“작년 의대 증원은 대단히 성급하게 결정한 잘못된 정책이라 생각한다. 아무 준비가 안 됐는데 정원 2000명을 늘리고 제대로 교육하라니 수용 불가다. 특히 정원이 40~50명 수준인 지방 ‘미니 의대’는 갑자기 4배나 늘어난 학생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지방 의료를 살리는 게 아니라 엉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교육을 받아야 하는 학생 입장을 생각하면 항의차 뛰쳐나간 것도 이해가 간다.”

-정부는 의대에 큰 예산을 투입해 교육 문제를 해결한다는 입장이다.

“돈만 투자하면 된다는 관료적 사고가 일을 망쳤다. 의대는 임상 수업과 병원 실습이 교육의 핵심이다. 근데 증원에 대비한 커리큘럼도 준비가 안 됐다. 전국 의대 정원이 다 폭발적으로 늘어나 인력 채용이 안 된다. 교수가 환자 보는데 실습한다고 의대생 8명이 멀뚱멀뚱 서 있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환자에게 민폐다. 건물만 몇 개 짓는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나.”

교육부가 전국 의과대학이 있는 40개 의대에 의대생의 대규모 집단휴학은 불가하다는 방침을 재차 알린 이날 서울 시내 한 의과대학 연구실 의자에 가운이 걸려 있다./연합뉴스

-그럼에도 의대생들이 복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낸 이유는.

“정부와 대학 총장들이 내년도 모집 인원을 증원 전으로 돌리기로 결단했다. 의대 학장과 의료계 원로들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정부가 밀어붙인 핵심 정책을 이렇게 철회하는 건 이례적이다. 40개 의대 학장이 한뜻으로 나선 것도 처음 본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이다.”

-어떤 점이 절박한가.

“의료 인력 양성 시스템이 무너지면 지역 의료가 먼저 붕괴한다. 수도권 병원들이 앞다퉈 지역 의료 인력을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지역 병원은 재정난·인력난에 의사들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가속화하면서 한순간 폭삭 주저앉을 것이다. 지금도 대구가톨릭대병원 등 지역 병원은 인력 부족으로 입원 병동 일부를 폐쇄하거나 통폐합하고 있다. 환자들이 진료나 수술을 늦게 받는 일이 만성화됐다.”

-의대생들은 ‘24·25학번 동시 교육 방안부터 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학장들이 머리를 싸매고 ‘5.5년제’ 등 최대한 정상 교육이 가능한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교수들이 혹사당하겠으나 학생들을 위해 희생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올해마저 복귀하지 않으면 내년엔 진짜 정상 교육이 불가능하다.”

-의대생·전공의는 ‘필수 의료 패키지 철회’ 등 7개를 수용하라는 입장이다.

“정부가 한발 물러났으면 의료계도 한발 물러나야 할 것 아니겠나. 이제 복귀해 교육을 받으면서 선배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길 바란다. 환자와 국민이 절실히 요구한다. 모든 조건을 다 들어줄 때까지 버티겠다고 나선 순간부터 사회적으로 용납 가능한 요구가 아니라 무리한 요구가 된다.”

-지금 돌아가면 손해라고 보지 않겠나.

“의료인의 판단은 ‘나의 최대 이익’이 아니라 ‘환자의 최대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 그게 이 직업의 본질이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학생 복귀 및 의대교육 정상화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뉴스1

-정부가 더 할 일은 없나.

“모진 말 좀 그만하라. ‘말 안 들으면 우리가 느그들 조질 수 있다’는 식의 표현이 너무 많았다. 자존심 강한 청년들을 자극해 상황을 악화했다. 부처끼리 목소리를 통일하고 진정성을 보여주길 바란다.”

-강경한 동료들의 압박에 돌아오고 싶은데 못 오는 의대생과 전공의들도 있다.

“환자에 대한 연민, 환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명감,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소명 의식이 의사의 구성 요소다. 육체와 정신과 영적인 복합체인 인간이 질병으로 겪는 고통이란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 의사가 그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직의 본분을 저버리고 얻는 이익이 무슨 의미인가. 국민과 환자로부터 존중을 잃은 채 의사가 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복귀해서 엉킨 매듭을 다 함께 풀자.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고 포기하고 팍 잘라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것 아닌가. 지혜로운 용기를 내달라.”

-전공의들 입장이 특히 완강하다.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전공의 생활을 했다. 1970년대 미국보다 지금 한국 수련 환경이 더 열악하다. 저임금 인력 확보에 초점을 두고 수련 시스템을 운영한 병원 탓이 크다. 정부도 이를 방기했다. 전공의들의 울분이 쌓여 태도가 완강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통받는 환자를 외면할 사유는 안 된다.”

-미국 생활은 왜 접었나.

“전공의 마치고 미국 월터리드육군연구소 예방의학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경북대 의대에서 교수가 필요하다고 편지가 왔다. 경력을 더 쌓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근 1년간 편지와 연락이 계속 오는 것 아니겠나. 국가와 고향과 모교가 부르는데 응해야 한다고 생각해 귀국했다.”

☞박정한 명예교수

경북 경산 출신으로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보건학 석·박사를 취득했다. 미국 월터리드육군연구소에서 예방의학과장으로 재직 중 경북대 의대에서 교수직을 제안받고 1981년 부임했다. 이후 대구가톨릭대 의대 학장, 세계보건기구(WHO) 자문 위원, 한국모자보건학회 회장, 대한예방의학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소아암 분야 권위자인 아내 하정옥(78) 영남대 의대 명예교수 역시 영남대 의대 학장과 의료원장을 지내는 등 부부가 평생 지역 의료를 위해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