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만난 조훈현 정미화(왼쪽) 부부가 바둑을 둘 때 손가락으로 턱을 괴는 조9단특유의 버릇을 흉내내며 활짝 웃었다. 백발의 남편은 지금도 아내 생일에 장미꽃을 선물한다. /이태경기자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만난 조훈현 정미화(왼쪽) 부부가 바둑을 둘 때 손가락으로 턱을 괴는 조9단특유의 버릇을 흉내내며 활짝 웃었다. 백발의 남편은 지금도 아내 생일에 장미꽃을 선물한다. /이태경기자

‘황제’ 두 명을 낳았으니 태황후라 불러야 하냐는 실없는 농담에 조훈현이 중얼댔다. “내조의 신이긴 하지.” 60년 바둑 인생에 아내의 지분이 “9.9할”이라고도 해서, 차(茶)를 내오던 정미화 얼굴이 붉어졌다. 실제로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師弟) 대결을 그린 영화 ‘승부’에서 “진정한 고수는 조훈현 아내”라는 평이 여성 관객 사이 쏟아졌다. 정미화는 몹시 민망해했다. “그저 배우 문정희씨가 남편과 창호 사이에서 맘고생하던 저를 잘 표현해 준 게 신기했다”며 웃었다.

◇똘이장군을 닮은 아이

-바둑 황제를 둘이나 길러낸 여인이라고 한다.

“아유, 그렇지 않다. 물론 두 사람 ‘생명줄’을 쥐고 있었던 건 맞다. 매일매일 밥해 먹이고, 대국장에 데려다주고 데려왔으니. 두 사람은 바둑기사, 난 운전기사였다(웃음).”

-조훈현이 열다섯 살 제자 이창호에게 패배한 날, 두 사람을 차에 태워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30년 전인데도 영화를 보니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더라. 뒷좌석에 두 사람을 태우고 운전하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남편이 져서 속상했을 텐데.

“본인이 더 힘드니 나는 속상해할 수도 없었다. 중요한 시합을 하고 오는 날 (남편) 머리를 만져보면 불덩이였다. 입이 깔깔한지 밥도 잘 못 먹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더 안타까웠다.”

-조훈현을 끝내 무관(無冠)으로 만든 이창호가 미웠을 것 같다.

“그렇게들 많이 물어보시는데, 창호가 다 컸구나 생각했지 미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창호는 내 자식 같았기 때문에, 아빠하고 아들하고 시합하고 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창호는 미워할 수가 없는 아이였다.”

-왜 그런가.

“이기고 오든, 지고 오든 창호는 항상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왔다. 스승을 이긴 날엔 죄송하고 면구스러우니 더 말이 없고. 남편을 봐도, 창호를 봐도 편하질 않으니 중간에서 나만 괴로웠다(웃음).”

-그러게 왜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여서 고생을 자초했나?

“한·중·일 최정상 기사들이 겨룬 1989년 잉창치배(應昌期杯)에서 극적으로 우승하고 돌아온 남편은 자기 혼자로는 변방의 한국 바둑을 발전시킬 수 없다며 제자를 길러내야 한다고 했다. 힘들어도 따라야지 어쩌겠나(웃음).”

-이창호가 처음 서울 연희동 집에 왔을 때 만삭의 몸이었다던데.

“시부모님 모시며 두 살인 큰애와 갓 태어난 아기를 키워야 하는데 창호까지 떠안게 된 셈이다. 대문을 들어서는 데 꼭 똘이장군을 닮았더라(웃음). 창호도 아홉 살 어린애이니 전주에서 시계점 하시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번갈아 가며 우리 집에 와서 살다시피 하셨다. 남편이 6형제라 명절이면 80여 명이 북적였고. 다행히 내가 건강 체질이라 병원 한번 안 가고 대식구를 건사했다.”

-이창호는 운동화 끈도 혼자 못 매는 아이였다고 하더라.

“세수도 할아버지가 시켜주던 아이였다(웃음). 운동화를 반대로 신을 때도 많고. 말도 거의 없어서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가 전부였다. 창호를 사위 삼고 싶어 하는 주위 분들이 많아서 중매도 몇 번 섰는데, 맞선 자리에서 당최 말을 안 하니 여자들이 다 도망갔다(웃음). 다행히 좋은 분 만나 딸 둘 낳고 잘 사는데, 지금도 만나면 말없이 인사만 꾸벅 하는 게 전부다.”

-조훈현과 이창호의 닮은 점과 차이점은?

“남편은 빠르다. 약속 시간 5분 늦는 것도 못 참는다. 외출할 땐 0.5초 만에 옷 다 입고 우리를 재촉한다. 창호는 느리다. 말도 걸음걸이도. 근데 착한 거는 둘이 똑같다. 바둑 외엔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도 같다(웃음).”

영화 '승부'에서 조훈현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이 대국 중 체력이 딸려 거의 눕다시피한 자세로 다음 수를 궁리하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당시 조훈현의 실제 모습이다. 조훈현은 자서전에서 "창호와 10시간 넘게 경기를 할 때면 온몸이 분해될 지경이었다"며 "중년의 바둑 황제가 무너져 내리는 슬픈 몰락의 장면이었다"고 썼다. /바이포엠스튜디오

◇베옷 입고 누운 채 바둑을?

-잉창치배에서 우승했을 때 가장 기뻤겠다.

“한중일 최정상 기사들이 참가했다지만, 한국은 우승권에 없는 나라였고 남편도 초반에 지고 올 거라 다들 예상했는데 녜웨이핑을 꺾고 우승했으니 모두가 깜짝 놀랐다.”

-현지에서 아내에게 직접 우승 소식을 전하던가?

“우리 남편은 휴대폰 가진 지가 얼마 안 됐다. 그것도 손주들과 영상 통화하려고 최근에 장만했다. 젊을 때부터 전화라고는 안 하는 사람이다(웃음).”

-영화를 보니 줄담배를 피우며 바둑을 두더라. 시합이 잘 풀리면 다리를 막 떨고.

“다리는 우리 집에 처음 인사하러 왔을 때도 떨었다(웃음). 시합이 잘 풀리면 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은 있다. 술은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데, 담배는 하루 대여섯 갑씩 피웠다. 즐겨 피우는 ‘장미’ 담배를 아무 가게에서나 팔지 않아서 한번 나가면 박스로 사다 놔야 했다.”

-끊으라고 잔소리를 좀 하시지.

“창호에게 모든 왕관을 빼앗긴 뒤 자기 관리를 하기 시작한 것 같다. 어느 날 기원에 데려다주고 방 청소를 하는데 담뱃갑이 그대로 있더라. 기원에 갖다줘야 하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안 피운 담뱃갑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창호에게서 다시 국수(國手) 타이틀을 가져왔다.”

-영화에 체력이 다한 조훈현이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 일명 ‘와기(臥棋)로 바둑을 두는 장면이 나온다.

“제일 민망했던 장면이다. 남편이 시원한 베옷을 좋아해서 삼베에 쌀풀을 먹여 여름 내내 입혔는데, 그걸 입고 저렇게 누워서 바둑을 둔 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충격이었다, 하하!”

-조훈현은 자서전에 ‘중년의 바둑 황제가 무너져 내리는 슬픈 몰락의 장면이었다’고 썼더라.

“대국이 아침부터 밤까지 10시간 이상 이어지면 온몸이 분해되는 것 같다고 하더라. 남편 말대로 젊음이 가장 무서운 거였다(웃음). 처음엔 힘들었지만 오십이 넘어가니 남편도 나도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다. 뺏고 빼앗기는 것이 인생의 순리. 영원한 것은 없더라.”

스승 조훈현과 제자 이창호의 대결을 그린 영화 '승부'. 이병헌과 유아인의 연기 대결도 볼 만하다.

◇벽에 못 하나 못 박는 남자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

“남편의 친척이었던 친구의 소개로.”

-어떤 점이 좋아서?

“눈이 살아 있더라(웃음).”

-벽에 못 하나 못 박는 남편이었다는데.

“시합이 많아서 일을 시킬 수도 없었다. 장을 보고 와도 무거운 건 내가 들고 남편은 내 핸드백만 받게 해서 먼저 올려 보냈다. 작년에 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 돌아오니 남편이 나보다 더 말라 있더라. 못 얻어먹어서(웃음).”

-다 큰 아이가 하나 더 있는 셈이었다고.

“매일 승부의 세계에서 사는 남편이 집에서만큼은 편안하게 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무것도 시키질 않았는데, 지금은 좀 후회된다(웃음).”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할 땐 반대하지 않으셨나?

“바둑진흥법을 꼭 만들어야 한다기에.”

-조훈현은 ‘뭍에 올라온 물고기 같았다’며 후회했던데.

“까만 거를 하얗다고 해야 하니 받아들여지지 않더란다. 요즘은 정치가 그때보다 더 극과 극으로 달리는 것 같다. 어떻게 국민이 나라 걱정을 하게 만드는지.”

-두 분이 다투기도 하시나?

“싸움이 걸리는 사람이 아니다(웃음).”

-패배한 날엔 짜증도 부릴 텐데.

“영화와 달리 남편은 내색을 안 했다. 시합 결과 묻는 것도 싫어했다. 무조건 ‘졌어!’ 한마디. 그래서 한번은 기원에 전화해 물어본 적이 있는데, 얼마 후 남편이 날 앉혀놓고 진지하게 말하더라. 이기든 지든 승부가 주는 고통은 오롯이 자신이 감내해야 할 몫이니 당신은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내가 참 훌륭한 남자와 살았더라(웃음).”

서울 평창동 자택 잔디밭에서 국수 조훈현과 아내 정미화씨가 바둑판을 두고 마주앉았다. 조훈현 9단은 "내 인생 전체 판을 지배한 아내는 고수 중에 최고수"라고 했다. /이태경기자

◇조훈현이 본 조훈현

-영화 ‘승부’를 어떻게 보셨나.

“바둑을 모르는 사람도 볼 수 있겠더라(웃음).”

-이병헌의 조훈현 연기는 마음에 들었나?

“나처럼 머리(가르마)도 가르고, 옷도 비슷하게 입었더라. 나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한 것 같고.”

-영화에선 이창호에게 진 뒤 무척 괴로워하던데, 미웠나?

“미운데 어떻게 가르치나. 예상보다 (성장이) 빨랐다뿐이지(웃음).”

-이창호가 천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던데.

“남다르다고는 느꼈지만 반짝반짝 번뜩이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조훈현을 꺾은 이창호의 힘은 뭘까?

“기다리는 힘. 낚시처럼 상대가 물 때까지 기다리고 물러서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승기를 잡는 것. 크게 이기려다 역전패당하는 것보다 반집이라도 안전하게 이기는 것이 창호의 바둑이었다.”

-자서전 ‘고수의 생각법’에 이창호에게 모든 타이틀을 빼앗기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고 썼더라.

“지는 법도 알게 됐으니까. 나도 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으니 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60년 바둑 인생에 최대 라이벌이라면?

“나 자신. 나에게 지면 남도 이길 수 없다.”

-최고의 명승부는?

“내겐 한판 한판이 다 소중했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어느 대국으로 돌아가 실수를 바로잡고 싶은가?

“바둑은 다시 돌아가 새로운 수를 둔다고 해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복기(復棋)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고통스러운 과정이라고 했다.

“두 번 죽는 거니까(웃음). 그러나 이기려면 자신의 실패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129수에서 역전의 승기를 잡은 잉창치배 5국처럼 인생도 그럴 수 있을까?

“물론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전의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최근의 정치 난맥은 어떻게 보셨나?

“국민을 두려워하는 정치인이 없더라. 칼만 휘두르려는 사람이 넘쳐 나더라.”

-흑 아니면 백인 바둑판도 잔인하긴 마찬가지 아닐까?

“칼에도 법도가 있다. 스승은 내게 ‘고수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정상의 무게를 견뎌낼 인성이 없으면 바로 추락한다.”

-조훈현은 바둑 천재인가?

“나는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을 가장 후회하는 사람이다.”

-아내에게 제일 고마울 것 같다.

“내가 열아홉 줄 반상(盤上) 위 고수였다면, 아내는 내 인생 전체의 판을 지배한 고수 중 최고수였다(웃음).”

☞조훈현·정미화

조훈현: 1953년 전남 영암 출생. 열 살에 일본으로 가 세고에 겐사쿠 9단 밑에서 수학한 뒤 1972년 귀국했다. 한중일 최정상 기사들이 참가한 1989년 잉창치배에서 우승하며 ‘바둑 황제’ 칭호를 얻었다. 세계 바둑계 최초 전관왕, 바둑 기사 최다 연속 우승, 세계 최초 바둑 국제기전 그랜드 슬램 기록을 세웠다. 20대 국회의원(자유한국당)을 지냈다.

정미화: 1956년 경기 용인 출생. 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1년여 직장 생활을 하다 1980년 조훈현과 결혼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1984년부터 7년간 남편의 내제자 이창호 9단을 뒷바라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