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대통령 계엄과 탄핵소추 이후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탄핵 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사실상 정치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대선을 의식한 행보를 하면 지지층으로부터 ‘윤 대통령 탄핵을 바라는 거냐’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 정치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민주당 정치인들도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나서면 지지층으로부터 ‘탄핵에 집중해야 할 때’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 상황에서 민주당 이재명 대표만 행동의 자유를 누리며 마음껏 독주하고 있다. 누군가 이를 ‘이재명의 빈집 털이’라고 했다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한국이 빈집이 됐고, 이 대표는 그 빈집에서 우클릭도 해보고 신통치 않으면 좌클릭도 해보며 운신의 폭을 최대한 넓혀가고 있다. 계엄부터 어제까지 113일간이었다. 만약 조기 대선이 이뤄진다면 다른 주자들보다 선거운동 기간이 3배나 긴 셈이다. 100m 달리기인데 이 대표는 50m 앞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대표는 이 기간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한경협(전경련 후신) 류진 회장과 만났고 4대 은행장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조계종 총무원장 등 종교계 인사들과도 만났다. 주한 미국 대사 대리, 주한 일본 대사 등 외교 관련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한·미·일 협력은 한국의 중대한 과제”라고 과거와 전혀 다른 언급을 했다. 중국의 서해 구조물에 대해서도 기존의 민주당과 다른 입장을 내놓았다. 국내외 언론과 접촉면도 크게 늘렸다.
특히 반도체 연구·개발직에 한해 주 52시간제를 예외로 하자는 놀라운 태도 변화를 보였다. 연금 개혁안에 대해 정부안을 전격 수용하는 결단도 내렸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기본 소득제도 포기하는 것처럼 언급했다. 중도와 중도우파 표까지 흡수하려는 선거 전략이었다.
이 대표는 이 중 주 52시간제 예외와 기본 소득제 포기는 곧바로 번복했다. 지지층이 반발하는 데다 중도, 중도우파 흡수 효과도 별로 없는 것으로 나타나자 바로 거둬들인 것이다. 만약 빈집 털이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 대표가 이런 심각한 식언을 쉽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 안팎의 경쟁 상대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신뢰의 위기에 직면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사람도 없는 빈집 상황이다.
빈집 털이 중에는 악재도 영향을 못 미치는 것 같다. 최상목 대통령 대행에게 “현행범”이라며 “몸조심하라”는 폭언을 했는데도 지지율에 영향이 없다. 정책과 말이 오락가락 표변하고 ‘거짓말할 것 같은 정치인’ 1위로 발표돼도 지지율은 요지부동이다. 30명이나 줄탄핵을 하고, 그중 헌재 판결이 난 9명 전원이 기각됐는데도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국정 문란 면허를 받은 듯하다.
이 기간 중 김문수, 오세훈, 홍준표, 한동훈 네 사람의 지지율을 합쳐야 이 대표와 비슷해지는 추세가 얼마간 지속됐다. 이 시기에는 ‘이재명 대 여권 후보’로 조사해도 막상막하였다. 그런데 빈집 털이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제는 국민의힘 네 사람 지지율을 합쳐도 이 대표에게 크게 못 미치고 어떤 조사는 절반에 불과하다.
이 대표는 어제 선거법 2심에서 통째로 무죄를 선고받아 이제는 빈집을 아예 차지할 것 같은 기세다. 유죄가 됐다면 민주당 내에서도 “이재명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었지만 원천 차단됐다. 남은 변수는 윤 대통령 탄핵 심판 결과밖에 없다. 탄핵이 기각이나 각하로 결론 나면 이 대표의 빈집 털이도 즉시 끝난다. 정국은 다시 ‘윤 대(對) 이’의 무한 정쟁 소용돌이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만약 윤 대통령이 탄핵될 경우엔 어떻게 될지 불확실한 측면이 있다. 탄핵이 인용되면 60일 이내에 대선을 해야 하고 국민의힘 대선 주자들이 선거운동을 바로 개시할 것이기 때문에 이 대표의 빈집 털이도 끝나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 대표의 선거법 2심은 통째로 무죄가 되고 윤 대통령만 탄핵된다면 이에 대한 반발이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광장에 나와 있는 탄핵 반대층이 전면적인 헌재 심판 불복 운동에 들어가고 여기에 윤 대통령이 가세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국민의힘은 대선 후보 경선조차 정상적으로 치르지 못할 수 있다. 치른다 해도 지지율 상승의 컨벤션 효과는 힘들어질 것이다. 자칫하면 이 대표의 빈집 털이 상황이 사실상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12월 3일 시작된 정치 급류가 가늠하기 힘든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