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한 자는 당해야 하는 것을 당한다.” 기원전 416년 아테네의 침공을 당한 밀로스 섬의 지도자들이 항의하자 아테네 지도부가 한 대답이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요즘에 와닿는다. 서방 세계 전체가 러시아의 부도덕성을 규탄하는 가운데 트럼프가 3년을 끌어온 전쟁을 단박에 끝내려는 최근 상황에 맞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지난 25일 미국과 러시아가 흑해 평화 협정에 조건부로 합의했다. 러시아는 자국의 농산물 수출을 위해 국영 농업은행에 대한 금융 제재를 풀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미국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반발하지만 미국 정부는 지난 1월 작성한 100일 로드맵을 일사천리로 진행하고 있다. 로드맵의 1단계는 3월까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셔틀 회담 진행, 2단계는 4월 20일 휴전 발표 및 쿠르스크에서 우크라이나군 철수, 3단계는 국제 평화 콘퍼런스 후 5월 9일 종전 선언이다. 정작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배려는 거의 없다.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30일 전면 휴전에 합의했지만 우크라이나 군대에 회복할 기회만 주는 휴전은 안 된다는 러시아의 반발 탓에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공격 중단으로 축소됐다.
이제 러시아로서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기만 하면 된다. 우크라이나에 외국의 군사 및 정보 지원이 끊기는 휴전 합의,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의 러시아 편입,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와 나토 가입 포기, 대통령 선거를 통한 우크라이나 정권 교체 등이다. 미국도 평화유지군 문제 외에는 큰 이견이 없어 로드맵대로 갈 가능성이 적지 않다. 러시아 최대 명절인 전승기념일인 5월 9일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푸틴, 트럼프, 시진핑, 김정은이 모두 모이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질 수도 있다.
러시아는 공식적인 협상과는 별개로 미국에 당근을 잔뜩 뿌려주고 있다. 판매 중단시켰던 러시아 기업 주식의 해외 매매를 미국의 헤지펀드인 683캐피털파트너스에만 허용했다. 휴지 조각이던 주식을 현금화할 수 있게 됐다. 세계 매장량의 20%를 차지하지만 채굴량은 0.6%에 불과한 희소 금속의 개발권을 미국에 줄 가능성도 생겼다. 북극과 우주에서의 미·러 협력에도 합의했다. 러시아의 투자펀드 회장이 일론 머스크를 만나고 화성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전략 무기 비확산에도 합의해 사실상 중국의 핵 감축을 압박하는 데 뜻을 같이했다. 이란의 이스라엘 파괴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데도 합의했다. 모스크바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자제령이 내려졌다.
우크라이나에 가혹한 종전 조건은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보인다. 방송 인터뷰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러 간 합의 테이블에서 우크라이나가 빠졌다는 지적에 대해 “식탁 의자에 없으면 메뉴에 있다는 속담이 있다”고 대답했다. 협상 과정에서 우크라이나가 빠지기는 어렵지만, 협상의 주체가 되기는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한 표현이다.
정치 양극화, 리더십의 무능과 부패로 맞이한 우크라이나의 비참한 운명이 그저 남의 일이 아니다. 차가운 손익 계산만이 남은 국제 질서에서 기술, 군사, 자원에서의 자강만이 살길이다. 한국에서 이 길은 극단적인 정치 분열로 막혀 있다. 1948년 민주당이 발의한 마셜 플랜을 공화당 소속 상원 외교위원장이었던 아서 반덴버그가 승인했다. 당시 반덴버그가 강조한 여야 협치 정신이 절실한 시점이다. “정쟁은 국경에서 멈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