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반, 마지막 관문은 셰익스피어 희곡 중 한 편을 필사하는 것이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든 그렇지 않은 학생이든 무조건 셰익스피어 희곡 중 한 편을 원고지에 필사해서 제출해야만 졸업할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원고지에 한 글자...
2024.10.17(목)
약속이 있는데 집에서 우물쭈물하다가 늦게 나왔다. 일찍 나오는 날은 버스도 빨리 오고 지하철도 내 발걸음에 딱딱 맞춰서 도착하는 거 같은데, 늦었다는 예감이 드는 날은 정류장에 도착하기 10초 전에 버스가 출발하고, 지하철 계단을 다다다닥 뛰어서 내려갈 때 지하철 문이...
2024.07.23(화)
연미복 차림 남자들이 진지한 말에 매우 우스꽝스러운 춤과 몸짓을 보여주는 ‘못 말리는 아가씨’란 제목의 영상이 최근 유행이다. 이른바 ‘숏폼(짧은 영상) 챌린지’. 유튜버 과나, ‘다나카’로 유명한 개그맨 김경욱, 크리에이터 닛몰캐쉬 등이 합작한 ‘잘 자요 아가씨’ 챌...
2024.05.01(수)
와인을 고르는 일은 무척 어렵다. 마트에는 수백 종의 와인이 경쟁하듯 늘어서 있고, 아무리 전문가라 할지라도 모두 알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프랑스 와인에 먼저 손이 간 경험이 있지 않은가? 사실 프랑스는 와인의 기원국도 아니고 현재 최대 생산국도 아니다....
2024.04.30(화)
요즘 스페셜티 커피에 빠졌다. 갓 내린 커피를 한 모금 음미하기 전 꼭 하는 일이 있다. 원두 산지와 수종(樹種), 재배 고도나 가공 방식이 적힌 설명문을 찬찬히 읽는 것.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를 설명하는 글을 읽으면 실제 그 지역의 향취가 느껴진다. 위스키와 와인 라벨...
2024.04.29(월)
1998년 봄, LG연암재단 해외연구교수로 UCLA에 체류하던 중 하와이 출신 3세 한인 여성 학자 스테퍼니 한을 만났다. 그에게 A4 크기의 낡은 종이에 타이핑된 62쪽 분량의 영문 연극 대본 ‘로터스 버드(Lotus Bud)’를 받고, 며칠 동안 흥분으로 밤잠을 설...
2024.04.26(금)
식당이나 카페에 갔다가 키오스크 앞에서 머뭇거리는 노인들을 만나곤 한다. 테이블에 앉아 서빙 로봇이 음식을 가져다주는 풍경도 이제 낯설지 않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서 있던 자리를 기계 장치가 대체하고 있다. 내키든 내키지 않든,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2024.04.24(수)
불과 열흘 전 눈이 내렸던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화창한 봄날, 보스턴 전체가 들썩이는 잔치가 열렸다. 123국에서 온 3만명이 함께 달렸고, 50만명이 모여 응원했다. 바로 128회 보스턴 마라톤이다. 우리에게도 보스턴 마라톤은 꽤 친숙하다. 1947년 한국인으로 ...
2024.04.23(화)
이달 초 불교 행사 두 건이 젊은 층 사이 큰 화제였다. 하나는 4~7일 열린 서울 강남 국제불교박람회.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이 K팝 걸그룹 하이키와 대담을 나누는 현장에 ‘번뇌멈춰’ ‘중생아 사랑해’ 등이 적힌 티셔츠 차림의 청년들이 가득했다. 하이라이트는 디제잉...
2024.04.22(월)
20년 전 우리 부부는 유럽 역사·문화 답사의 대장정에 올라 만 5개월 동안 자동차를 몰고 20국 120여 도시를 돌았다. 서구를 지배하던 ‘중세적 보편성’의 자취와 단일 질서의 역사적 흔적들에 대한 호기심이 우리를 추동한 것. 문헌학도인 나는 늘 서재를 벗어나 현장을...
2024.04.19(금)
나이지리아 출신의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서구 위주의 문학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나이지리아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어린 시절 자신이 읽고 쓰던 이야기 속 등장인물은 모두 백인에 푸른 눈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서구 문화를 일부 답습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
2024.04.18(목)
아는 맛이 무섭다. 파리에서 시작돼 세계로 순식간에 퍼져 나간 크루키(crookie) 열풍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크루키는 크루아상과 쿠키의 합성어로 크루아상을 가로로 반 자른 다음 안쪽과 위에 초콜릿 칩 쿠키 반죽을 채우고 구운 것이다. 처음 등장한 곳은 2022년 ...
2024.04.17(수)
미국 마트에서 김치를 찾는 것은 쉽다. 포장지에는 한국어 발음 그대로 ‘Kimchi’ 라고 적혀 있다. 주변의 많은 외국인 동료들도 김치 사랑을 고백한다. 집에서 직접 김치를 담가 먹는 영국인 친구도 있다. 아직도 부모님께 김치를 공수해 먹는 한국인을 숙연하게 만든다....
2024.04.16(화)
이달 초 막을 내린 통영국제음악제에 다녀왔다. 음악도 듣고 풍광도 즐기고 살도 찌우는 시간이었다. 음악제가 열리는 시기 통영엔 벚꽃이 피고 도다리쑥국이 밥상에 오른다. 다도해 풍경에 눈이 즐겁고 충무김밥, 굴 요리, 다찌(통영식 술상)에 입도 흡족했다. 축제 기간 펼쳐...
2024.04.15(월)
전원에 집을 짓고 나자, 어디선가 오동나무 씨앗이 날아와 싹이 텄다. 작고 여리던 싹이 어느덧 주변의 초목들을 까마득히 내려다볼 만큼 커졌고, 동네의 명물이 되었다. 그를 유심히 관찰하며, 그의 곁에 갈 때마다 어루만지거나 말을 걸어본다. ‘네가 늙어 혼자 서 있기 어...
2024.04.12(금)
화사한 봄꽃이 피어나니 캠핑장 예약이 더 어려워졌다. 본격적인 캠핑 시즌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은 쌀쌀한 저녁에 모닥불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기에도, 토치로 불 쇼를 벌이며 숯불을 직접 피우기에도 좋은 계절이다. 십여 분씩 뒤적거리며 가열해야 해서 열원으로 쓰기에는 부...
2024.04.10(수)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는 백악관을 비롯해 링컨 기념관,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 등 세계적인 명소가 즐비하다. 그런데 그 쟁쟁한 목록에서 우리 옛 공사관이 최근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는 소문이다. 백악관 북동쪽의 로건 서클에 위치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은...
2024.04.09(화)
신인그룹 ‘영파씨’가 지난달 20일 낸 노래 ‘XXL’은 1995년에 갓난아기나 코흘리개 정도 나이만 아니었다면 단번에 알아챌 비트가 고막을 때린다.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 4집에 실린 히트곡 ‘컴백홈(Come Back Home)’을 오마주한 것. 발표 6일 만에 뮤직비...
2024.04.08(월)
국민학교 시절, 등교한 아이들의 일상적 관심사는 뻔했다. 누가 ‘팔뚝만 한’ 망둥이를 잡았고, 누구네 소가 송아지를 낳았으며, 누구 누나가 이웃 마을로 시집간다는 등 자잘한 사실들을 빼면 늘 귀신과 도깨비 이야기만 남았다. ‘힘이 최고’라는 믿음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
2024.04.05(금)
지난해 제4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인 박참새 시인의 수상 소감이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미국 작가 찰스 부코스키(1920~1994)의 말을 인용하며 ‘그의 깡패스러운 면을 닮고 싶다… 깡패가 되고 싶다’고 쓴 것이다. 그의 수상 소감에 대해 ‘이런 게 ...
2024.04.04(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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