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인의 20대 중반 아들이 갑자기 어머니에게 볶음밥 만드는 법 좀 가르쳐달라고 하더란다. 어머니는 자기한테 해주려고 하나 은근히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아들이 유튜브에 빠지더니 어느 날 여자 친구와 얘기하다 계엄에 찬성한다고 말해버렸다. 평소 페미니즘 성향이 있는 여자 친구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당장 헤어지자고 말싸움을 하다 “오빠는 볶음밥도 못 만들고 사과도 못 깎잖아”라고 했다는 것이다. 헤어지기는 싫은 아들이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볶음밥을 배우는 것이다.
얘기 들을 때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웃어넘길 일은 아닌 것 같다. 젊은 남녀가 정치·이념 문제로 다투는 일은 지인 아들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혼 정보 회사 선우 이웅진 대표는 “최근 정치 성향이나 보수·진보 문제로 남녀 간 만남이 깨지는 일이 늘어 골치 아프다”며 “적어도 알아가는 과정에서는 정치 얘기를 하지 말라고 귀띔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통계를 봐도 문제가 상당히 깊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찬성과 반대 집회에 참석한 2030 남녀 숫자가 각각 3배까지 차이가 났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지난해 나온 보건사회연구원 사회 갈등 실태 조사를 보면, 응답자 중 절반이 넘는 58%가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 연애·결혼을 할 수 없다고 했다. 33%는 정치 성향이 다르면 사교를 위한 술자리에도 응하지 않겠다고 했다.
필자가 젊었을 때는 못 보던 현상이다. 간혹 지역 문제가 연애의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1990년 말에 경상도 출신 청년이 전라도 출신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면서 겪는 우여곡절을 그린 TV 미니시리즈(‘머슴아와 가이내’)가 나온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지만 대선 지지 후보 문제로 이혼 직전까지 갔다가 결국 다시 화합하는 정도의 내용이었다.
젊은 남성의 보수화, 여성의 진보화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지난해 11월 미국 대선에서도 20대 남성 56%는 트럼프를 지지했지만 20대 여성 58%는 해리스에게 표를 던졌다. 독일의 경우 극우 정당인 독일대안당 지지자가 젊은 여성보다 젊은 남성이 2배 높게 나타났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나라 젊은 남녀의 갈등이 유난히 깊고, 계엄과 탄핵 국면에서 더 깊어지고 있다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런 추세가 적어도 5~10년은 갈 것 같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젊은 층의 정치·이념 갈등 또는 양극화는 단순히 표심으로 드러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세계 최저 수준인 결혼과 출산율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정부 저출산 대책 보고서나 시행 계획을 보면 젠더 갈등이라는 표현은 없지만 이를 전제로 갈등을 완화하려는 시도를 적지 않게 담은 것을 볼 수 있다.
사는 곳 근처인 홍대 앞 거리를 지날 때면 서로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젊은 커플을 수없이 본다. 이게 자연스러운 일인데 어쩌다 이대남·이대녀의 정치·이념 갈등이 수치로 확연할 정도로 나빠졌을까. 이유를 따지고 들어가면 상당히 복잡한 문제다. 답답한 마음에 챗GPT에 꼬치꼬치 물어봐도 관용, 포용, 공정성이 필요하다 같은 원론적인 내용만 반복해 내놓는다.
다만 하나 분명한 것은 있다. ‘여성가족부 폐지’ ‘여성 할당제’ ‘성범죄 무고죄 강화’ 논란 등과 같은 정치인들의 공약이나 발언이 남녀 갈라치기를 부추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공약이나 발언은 몰라도 젠더 문제만큼은 남녀 갈등을 부추길 우려는 없는지 재삼재사 특히 신중을 기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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