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연못에 웬 형광색 스티로폼이 둥둥 떠다닌다. 설치미술가 구동희(46)씨의 ‘비상–수평선’ 연작이다. 전국 15개 도시에 산재한 ‘비상(飛上)’이라는 동명의 이름을 지닌 조각만을 본따 소형 스티로폼으로 다시 제작한 것이다. 비상할 수 없는 육중한 조각들이 이곳에 이르러 부표처럼 가벼워진다.
덕수궁이 야외 전시장으로 잠시 변모한다. 가볍게 단풍 구경 왔다가 뜻밖의 미적 경험을 챙겨갈 수 있다. 서울정동동아시아예술제위원회·중구청 주최 ‘아트 플랜트 아시아 2020’ 행사로, 덕수궁 내 준명당·즉조당·정관헌 및 함녕전 행각 일대에 윤형근·박서보 등 단색화 거장과 강서경·양혜규 등 유명 작가 33인의 작품이 놓여있다. 주최 측은 “코로나 사태로 실내 전시장 물색이 어려워지면서 나온 아이디어”라고 했다.
덕수궁 유일의 2층짜리 목조 건축물 석어당 내부를 설치미술가 이불(56)씨의 대형 조각 ‘키아즈마’가 채우고 있다. 염색체의 새로운 조합을 의미하는 희고 난해한 형상이 오래된 목조 건물 속에서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피고 지는 각기 다른 15송이의 장미 초상을 담아낸 사진가 정희승(46)씨의 연작 ‘Rose is a rose is a rose’는 즉조당에 놓여 있다. 앞뒤가 훤히 개방된 즉조전과 분홍의 장미 군락이 어울리며 이색 포토존으로 기능한다.
궁궐 내 굴뚝과 소화전 원형을 대리석 판재로 재현한 설치미술가 최고은(35)씨의 ‘오페쿨러’ 등 재기 넘치는 장소 특정적 설치작도 준비됐다. 다만 미술품인지 아닌지 헷갈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작품도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2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