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전문가라서 역시 법을 잘 이용하더군요. 최근 의혹과 물의를 빚는 전·현직 법무 장관도 법 전문가이고, 이들을 옹호하는 분 중에도 판사·검사·변호사 출신 법 전문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불법 아니라고 목청을 높이거나, 법 들먹이며 잘도 빠져 나갑니다. 그러니 ‘법꾸라지’나 ‘법비(法匪)’ 같은 말이 나왔겠지요.
다산 정약용(1762~1836)도 법을 고민했더군요. 대표작 중 하나인 ‘경세유표’는 당초 제목이 ‘방례초본(邦禮草本)’입니다. ‘방례’는 나라의 예(禮)란 뜻이지요. 다산은 서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책에서 논하는 것은 법(法)이다. 법이면서도 이름을 예(禮)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옛 성왕(聖王)은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예로써 백성을 인도했다. 그런데 예가 쇠퇴해지자 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법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아니고 백성을 인도하는 것도 아니다.”
다산은 “온갖 천리(天理)의 법칙에 합당하고 모든 인정(人情)에 화합하는 것을 예라 하며, 두렵고 비참한 것으로 협박하여 백성이 벌벌 떨며 감히 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법이라 한다”면서 “고대의 성왕은 예로 법을 삼았고, 후대의 제왕은 법으로 법을 삼았으니 이것이 고대와 후대가 같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법의 바탕에 예가 있다는 말이겠지요. 기본적인 예를 버리고 법만 말할 때 국민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공자가 ‘논어’에서 얘기했습니다. “백성들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진다[民免而無恥].” 나라의 장관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뭔들 부끄럽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