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마이클 샌델 지음|이경식 옮김|김선욱 감수|와이즈베리|436쪽|2만원

미국 초대 재무부 장관 알렉산더 해밀턴(1757~1804)은 미국 능력주의를 상징한다. 영국 식민지 서인도제도에서 혼외자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됐다. 그렇지만 미국 독립전쟁 시기 활약하며 미국의 금융 경제 체제의 주춧돌을 놨다. 자신의 실력으로 입지전을 썼다. 많은 사가들이 지금 미국의 번영이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미국 10달러 지폐에 그의 얼굴이 있다. 이 ‘개룡남’은 2015년 미국 브로드웨이를 강타한 힙합 뮤지컬로 다시 살아났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본질적으로 미국적 이야기”라며 뮤지컬을 여러 번 관람했다. 재능과 노력으로 계층 상승을 해낸 서사는 좌우 모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해밀턴은 미국이 강한 제조업을 기반으로 금융 자본주의를 펼치는 국가로 성장해야 한다고 믿었다. 해밀턴은 “인간에게 지배적인 열정은 야망과 이익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열정이 공공선에 기여하도록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했다. 개인의 이기심을 국가 발전에 활용하겠다는 복안이었다. 마이클 샌델도 거든다. “해밀턴의 기념비는 그가 상업과 금융의 경제적 초강대국으로 탄생시킨 미국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샌델은 해밀턴이 대표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특징이 지금의 불평등과 사회적 혼란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샌델이 1996년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원제 Democracy’s Discontent)’이란 제목으로 처음 냈던 것. 그는 지난해 책을 4분의 1 이상 고쳐 써서 다시 냈다.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은 사반세기 동안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2008년 금융 위기, 트럼프 현상,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미국 민주주의는 왜 계속 흔들렸는지에 대한 그의 답이다.

미국 능력주의의 상징인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털 ‘해밀턴’. 샌델은 해밀턴이 대변하는 능력주의가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키웠지만 그 능력주의 때문에 현재는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고 한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그가 보기에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이유는 능력주의 때문이다. 그는 불평등을 능력과 노력 차이로 설명하려고 하는 ‘능력주의’를 전작 ‘공정하다는 착각’에 이어 다시 한번 비판한다. 이제 가난한 사람은 능력도 없고 노력도 안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노력했지만 형편이 안 좋아서, 세계화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한 불운한 사례도 많다. 능력주의는 이들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했다고 샌델은 말한다.

가뜩이나 화나 있던 ‘패배자’들은 2008년 금융 위기를 통해 정치적으로 세력화한다. 오바마 정부는 거대 투자은행에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능력주의에 따라 자칭 엘리트라며 돈을 긁어모으던 이들은, 세계적 금융 위기를 책임지지 않았다. 국민 세금이 했다. 샌델은 “2008년 구제금융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좌파의 점거운동과 우파의 트럼프 대통령 지지로 이어졌다”고 한다.

샌델은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면 능력주의에 제동을 걸고, 경제가 정치를 지배하는 지금과 달리 정치가 경제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뿌리 깊은 미국 전통이라고 말한다. 연방주의자 해밀턴에게 맞섰던 미국 공화주의를 언급한다. 토머스 제퍼슨에서 시작돼 프랭클린 D 루스벨트로 이어져온 전통이다. “경제적 불평등 앞에서는 우리가 예전에 쟁취했던 정치적 평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좌파 급진주의자가 한 말이 아니다. 루스벨트가 한 말이다. 샌델은 이 시기까지도 정치가 경제를 제어하던 미국적 전통이 살아있었다고 본다.

이제 정치는 ‘어떻게 경제 규모를 키우고 과실을 분배할까’에만 신경 쓴다. 세계화와 자유무역협정은 뉴턴의 고전물리학 법칙처럼 되묻지 않는 ‘진리’가 됐다. 샌델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경제적 법칙’이라는 이유로 불평등을 조장하는 시스템에 대해 토론하지 않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면 사회 구성원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영토는 쪼그라든다. 불평등이 ‘능력주의’로 정당화되면서 경쟁에서 패배한 이들의 목소리는 더 소외됐다. 트럼프 현상은 이를 드러냈고, 여전히 미국을 분열시키고 있다. 샌델은 정치 영역에서 공공선(public good)을 추구하며 경제 정책을 통제해야 민주주의에 생명력을 다시 불어넣을 수 있다고 한다.

지난 한국 대선에서 공정과 능력주의는 뜨거운 감자였다. 학벌주의를 중심으로 한 능력주의는 공고하다. 샌델이 재인용한 막스 베버의 문장을 소개한다. “운이 좋았던 사람은 자기가 운이 좋았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 운을 누릴 권리가 있고,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확신하고 싶어한다.” 운이 좋은 자가 내 실력이 더 뛰어나다며 패자를 멸시하는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 샌델의 정치경제학 입장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도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