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R.R. 톨킨 동화 선집
J.R.R. 톨킨 지음 | 폴린 베인스, J.R.R. 톨킨 그림 | 김보원·이미애 옮김 | 아르테 | 전 5권 | 12만8000원
현대의 대중문화는 마법사와 요정, 기사와 괴수(혹은 용)들로 넘쳐 난다. 소설이나 만화, 천문학적 자본과 첨단 기술을 투입하는 게임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흔히 ‘판타지’라고도 불리는 환상 문학의 힘은 강력하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오르다 보면 결국 한 사람과 마주친다. 각 1억부 이상 팔린 것으로 추산되는 ‘호빗’(1937)과 ‘반지의 제왕’(1954)의 작가, J.R.R. 톨킨(1892~1973)이다.
중세 문학·언어학자이자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였던 톨킨의 이름 앞에는 ‘현대 판타지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가 단순히 베스트셀러 환상 소설의 작가가 아니라, 신과 악마, 요정과 인간이 뒤얽힌 ‘가운데땅(Middle-Earth)’ 수만 년 역사와 언어를 포함한 하나의 세계를 고안해 낸 창조자였기 때문이다. 이후의 환상 문학 작가들은 톨킨이 먼저 낸 길 위에서 그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톨킨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려고 만들어낸 동화 이야기 5권을 묶은 선집. 이야기 자체로 흥미로울 뿐 아니라, 톨킨 팬들에겐 ‘가운데땅’ 이야기와의 접점을 상상하는 즐거움도 크다. 톨킨 문학 커뮤니티와 협력해 전문 번역가들의 솜씨로 톨킨의 저작을 꾸준히 소개해 온 북이십일의 문학 전문 브랜드 아르테가 펴냈다.
얼떨결에 거인과 용을 퇴치해 영웅이 되는 남자의 이야기 ‘햄의 농부 가일스’에선 황금과 보물을 독차지한 ‘호빗’의 용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자녀들이 갖고 있던 네덜란드 인형에서 시작된 이야기 ‘톰 봄바딜의 모험’의 주인공 ‘톰 봄바딜’은 ‘반지의 제왕’에 등장해 가운데땅 세계에 편입됐다. 지상에서 가장 오래 산 자로 어둠의 군주가 세상으로 나오기 전의 세상을 알고 있다고 묘사되며, 프로도 일행을 돕기도 하는 신비한 인물이다.
마법에 걸린 강아지 로버의 여정을 따라가는 ‘로버랜덤’은 영국의 한 해안가에서 강아지 인형을 잃어버린 아들을 위로하려 만든 이야기. 뛰어난 학자이자 거대한 세계의 창조자였던 톨킨도 슬퍼하는 아들을 달래려 쩔쩔매며 이야기를 지어낸 아버지였다고 상상하면 웃음이 난다.
책 ‘나무와 이파리’에선 숲을 그리는 화가를 통해 창작의 고통과 열망을 담은 이야기 ‘니글의 이파리’와 함께 톨킨의 에세이 ‘요정 이야기(Fairy-story)에 관하여’를 만날 수 있다. 줄곧 그를 괴롭혔던 주변의 오해와 몰이해에 점잖게 항변하는 동시에 환상 문학이 갖는 가치를 역설하는 톨킨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는 요정 이야기를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하위 창조’로 규정하고, 선하고 정의로운 이들이 승리하는 결말이 주는 위로가 인생의 진실을 드러내는 비극 못지않게 가치 있다고 말한다.
‘큰 우튼의 대장장이’는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펴내고 10년이 지난 뒤 쓰기 시작해 75세가 되어서야 출간했다. 에세이 ‘요정 이야기에 관하여’에서 개진한 이론적 개념을 상상력을 통해 인간 세계에서 경계를 지나 요정 세계를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요정은 작고 귀여운 존재가 아니며, 요정의 땅 역시 케이크처럼 달콤하기보다는 어리석고 무모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과 감옥이 있는 위험천만한 곳이다. 신비로운 존재의 가호로 그 세계를 엿본 사람이라 해도 그 경험을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으며, 할 수 있는 일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뿐이다.
톨킨이 좋아했던 삽화가 폴린 베일스의 삽화 130여 점도 함께 만날 수 있다. 높게 책정된 가격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