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이거 기가 막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전시장 입구에 서자마자 손뼉을 딱 소리나게 쳤다. ‘으하하’ ‘엄마’ ‘밥’ 같은 네온사인 글자가 명멸하는 최정화의 설치 작품 뒤로 선사시대 동물·물고기·사냥 그림이 그려진 반구대 암각화 탁본이 거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 둘을 묶었다는 게 뭉클하네요. 반구대 암각화가 지니고 있는 기록성, 이게 바로 한민족 언어의 탄생이죠. 문자가 없던 시절 삶의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주잖아요? 이게 바로 ‘ㄱ의 순간’이지.”
지난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을 찾은 정 청장은 관람 첫발부터 감동을 쏟아냈다. 가야 토기와 함께 전시된 김혜련의 ‘예술과 암호-고조선’ 대형 연작 앞에서도 한참을 머물렀다. “김 작가를 정말 좋아해요. 신석기·청동기·삼국시대 등 고대 유물을 찾아다니면서 기하문(幾何文)의 기원을 추적하는 작가인데 고고학적 상상력이 어마어마하죠. 우리 DNA 속에 흐르고 있던 한글의 연원을 끄집어내서 유물과 현대 작품을 어우러지게 한 점이 굉장히 신선해요.”
이날 정 청장은 오감(五感)으로 전시를 즐기고 만끽했다. 서예박물관 1층에 설치된 강익중의 ‘트롯 아리랑’ 앞에선 마이크를 잡고 노래 한 토막을 흥얼거렸고, 세종대왕의 ‘여민락(與民樂)’에 맞춰 움직이는 무용수의 맨발을 보여주는 김효진 작품 앞에서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동작을 따라 했다. 백남준의 TV 화면과 맞은편에 걸린 천전리 암각화 탁본을 보면서도 “이 원초적 조형 의식이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했다.
정 청장은 “우리는 그동안 한글을 해외에 알릴 때 K컬처와 연결하려는 측면이 강했지만, 이제는 한글 자체의 생명력에 주목했으면 좋겠다”며 “한글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만든 이 전시가 바로 그 시작”이라고 했다. “언어학적 틀에 갇혀 있던 한글을 해방시킨 전시라고 봐요. 올해 ‘ㄱ의 순간’을 시작했으니 내년엔 ‘ㄴ의 순간’, 후년엔 ‘ㄷ의 순간’ 이렇게 해마다 하면 좋겠어요(웃음).”
문화계 인사들의 관람도 이어지고 있다. 이영혜 디자인하우스 대표는 “한글의 탄생 이전과 이후를 종과 횡으로 엮어낸 기획력이 돋보였고, 작품도 오래된 유물부터 현대미술까지 입체적으로 펼친 전시”라며 “전 세계 언어를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의 가능성에도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 사라진 자모들을 되살리면 B와 V, P와 F를 구분해 쓰는 등 세계 언어를 더 정교하게 한글로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이상봉 패션디자이너는 “오인환 작품은 향이 타면서 글자를 남기는 것이 유구한 세월 동안 격동의 시기를 겪으며 이어진 한글의 역사를 은유하는 것 같았고, 강이연 영상 ‘문'은 한글의 외연을 넓혔다”고 평하며 “내가 처음 한글을 의상에 도입했을 때 아이들의 순수한 눈으로 본 한글처럼 한글을 망가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난도 있었지만 이제 한글을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 반가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