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아직도 ‘아메리칸 드림’을 믿지만 세대를 거듭할수록 계층 상승 가능성은 줄어들고 있다. 한국도 미국 못지않게 불평등이 뚜렷한 능력주의 사회처럼 보인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8일 조선일보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 웨비나에서 ‘정의와 공정’을 주제로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대담했다. 최근 국내 출간된 샌델의 신작 ‘공정하다는 착각’은 개인의 능력만으로 성공이 결정된다는 믿음을 부순다. 그는 “능력주의는 패자에겐 ‘전부 내 탓’이라는 좌절감을, 승자에겐 ‘내가 잘나서 성공했다’는 오만을 안겨준다”면서 “승자와 패자의 간극을 극복하려면 능력주의 사고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샌델은 한국의 대학 입시 제도인 ‘수능'을 한국어로 정확히 발음했다. “대개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성공한다고 믿지만, 미국에선 부모의 소득과 자녀의 성적 간에 높은 상관관계가 드러났다. 한국의 부유층도 자녀의 수능 성적을 위해 교육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자라는 내내 성공에 대한 스트레스와 압박에 시달리며 결국 ‘상처받은 승자’가 된다.”
“코로나가 일깨운 저소득 육체 노동자의 가치… 엘리트, 더 겸손해져야”
“한국인은 정의와 공정이 무엇인지, 좋은 사회란 무엇인지 함께 얘기하고 싶어한다. 연세대 노천극장에 모인 1만4000여 명 앞에서 강연한 적 있다. 사회적 가치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하는 한국 젊은이들의 열정과 갈망을 느꼈다. "
마이클 샌델 미 하버드대 교수는 2010년 국내 출간 후 밀리언셀러가 된 책 ‘정의란 무엇인가’의 인기 비결에 대해 “더 큰 질문, 더 큰 담론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성향 때문에 내 책에 뜨겁게 반응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작 ‘공정하다는 착각’에서는 하버드대생들 사이에서 점차 짙어지는 능력주의 정서와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사이의 연결고리에 대해 말한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 같은 포퓰리스트의 성공은 엘리트의 오만에 노동자층이 분노했기 때문”이라며 “이는 세계화의 이익을 독점해온 엘리트층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했다.
샌델과 대담한 서울대 이재민 교수가 “능력주의의 결과로 엘리트들은 성공에 있어서 운의 역할을 잊고 겸손함이나 인간애를 잃는다”고 하자 샌델 교수는 “겸손하지 못한 엘리트의 태도가 대중의 분노를 샀고, 포퓰리즘의 반란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엘리트층의 오만한 태도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우리가 잊고 있던 노동의 존엄성을 되돌아봐야 한다. 임금 수준이 높든 낮든, 대학 학위가 있든 없든 노동자층의 일을 존중하고 사회적 명예를 인정해줘야 한다. 또한 성공한 자들에겐 ‘운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운의 역할을 인정하면 겸손해질 수 있고, 불운한 이들에 대한 존중과 연대 의식을 배울 것이다. 지금 목도하는 극심한 사회적 양극화는 우리의 결속과 유대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 속에서 능력주의는 강화될까, 아니면 ‘함께’라는 연대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까.
“흥미로운 질문이다.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우리는 배달원이나 물류 창고 직원, 트럭 운전사에게 얼마나 크게 의존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운이 좋은 사람은 안전하게 집에서 근무하겠지만, 바이러스에 노출될 위험을 안고 최전선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 대한 보상과 사회적 인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논의해야 한다.”
-지금 온라인으로 대담하는 것처럼 디지털 경제도 점차 활성화되고 있다.
“하버드대에서도 이번 학기는 ‘정의’ 강좌를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의 대면 활동을 대체할 순 없다. 로봇이나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의 일자리를 뺏을 것이라 예측하기도 하지만, 기술은 인간을 대체하기보단 보완할 것이라 본다. 인간에게는 생계뿐 아니라 일터에서의 사회적 관계, 공공선에 이바지한다는 인정이 중요하다.”
-능력주의에 대한 분노가 정치적 담론을 형성하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정치 양극화를 발견할 수 있다. 논리적 사고에 기반을 둔 토론을 하지 않고 남의 의견을 듣지 않은 채 자기 목소리만 높인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이들은 선거 부정의 증거가 없는데도 믿질 않는다. 대학 학위가 없는 이들이나 노동자층은 엘리트들이 자신을 모욕했다고 믿고 더는 미디어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한다.”
-당신은 지난 40년간 세계화가 능력주의를 강화해왔다고 비판했다. 세계화와 평등이 공존할 수는 없을까.
“세계화와 평등이 반드시 대립하진 않는다. 어떤 정책, 어떤 세계화인지가 중요하다. 지금까지 세계화를 이끈 이들은 세계화로 인한 경제적 이익을 공중 보건 제도를 개선하거나, 교육·직업 훈련에 투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그 혜택을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과 나눌 수만 있었다면 세계화와 평등은 양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책에서 대학 입시를 추첨제로 바꿔 제비뽑기로 학생을 선발하자는 도발적 제안을 하기도 했다.
“지금의 대학 입시에서도 운이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다. 보통 하버드대에 4만명이 지원해 2000명 정도가 합격한다. 입학 사정관들은 지원자 중 대부분이 하버드대에서 공부할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고 말한다. 그러니 최소한의 능력을 갖춘 학생들끼리 제비뽑기를 해 학생들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승자가 좀 더 겸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내 도발적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 같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