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아야 흥행한다?

한국 영화 평균 러닝타임이 단축되고 있다. 2017년 129.2분, 2018년 126.3분, 2019년 117.4분, 2020년 114.3분···. 흥행 톱10은 3년 사이에 15분이나 짧아졌다. 2019년 개봉한 ‘극한직업’(111분)과 ‘엑시트’(103분), 지난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108분)와 ‘#살아있다’(98분)가 증명했듯이 ‘상업영화=120분’ 공식은 깨졌다. 한때 130분을 향해 몸집을 불리던 한국 영화들이 이젠 110분 쪽으로 감량 경쟁을 하고 있다.

영화 ‘#살아있다’는 98분 길이지만 2020년 한국 영화 박스오피스 6위에 올랐다. 좀비로 변해가는 사람들 속에 고립된 남자(유아인)의 생존기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요즘 극장 영화는 유튜브 등 숏폼 콘텐츠(10분 안팎)와 넷플릭스 같은 OTT 사이에서 협공을 받는 중이다. NEW 홍보팀 양지혜 부장은 “숏폼 콘텐츠에 익숙한 젊은 관객(MZ 세대)은 긴 영화를 부담스러워한다”며 “러닝타임 축소는 짧고 임팩트 있는 영화를 선호하는 수요와 상영 회차를 더 확보할 수 있다는 공급 논리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영화도 ‘다이어트’

‘명량’(120분)부터 ‘신과 함께: 인과 연’(141분)까지 역대 한국 영화 흥행 톱10은 평균 129.2분이다. 제작비 규모가 커지면서 상영 시간도 길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김형호 영화시장 분석가는 “흥행작의 평균 러닝타임은 2016~17년 극점(129분대)을 찍고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라며 “최근엔 길지 않아도 장르성이 강한 영화들이 히트하고 있다”고 했다.

‘쉬리’(115분), ‘왕의 남자’(119분), ‘괴물’(119분)을 비롯해 2010년 이전 흥행작은 대부분 120분을 넘지 않았다. 사극처럼 제작비를 많이 쓴 영화일수록 볼거리와 인물이 늘어 상영 시간이 길어지지만 최근엔 2017년 ‘남한산성’(139분), 2018년 ‘안시성’(135분) 이후 사극의 흥행 타율이 떨어졌다. 올해 한국 영화 박스오피스 1위 ‘발신제한’(94분)을 포함해 ‘모가디슈’(121분), ‘방법: 재차의’(109분), ‘인질’(94분), ‘씽크홀’(118분) 등 여름 성수기를 노린 영화들은 다시 10여년 전 수준으로 짧아졌다.

영화 '극한직업'(2019)은 역대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한 흥행작이지만 러닝타임은 111분에 불과하다. /CJ ENM

◇유튜브에 치이고 OTT에 밀리고

극장에 가지 않아도 짧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시대다. 젊은 관객은 유튜브 영상이나 OTT 콘텐츠에 익숙하다. 영화의 러닝타임 축소는 이 새로운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 수정으로 읽힌다. 김형호 시장 분석가는 “유튜브 인기 영상은 10분 안팎이고 월정액을 내는 OTT는 아무 부담 없이 앞만 보고 더 볼지 말지를 결정한다”며 “영화도 에피소드가 짧고 전환이 빨라야 시장성이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짧으면 배급에도 유리하다. 관람 인기 시간대는 정해져 있고 현재는 코로나 사태로 밤 10시면 극장이 문을 닫기 때문이다. ‘정직한 후보2’를 준비 중인 장유정 감독은 “제작사나 투자사가 러닝타임 축소를 요구하진 않는다”면서도 “유튜브를 1.2배속, 1.4배속 등 빨리 돌려보고 영화도 축약본이 유통되는 시대라 소비 취향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고 했다.

◇긴 블록버스터 시대의 종말?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벤져스: 엔드게임’(181분), ‘분노의 질주’(141분), ‘블랙 위도우’(134분) 등 외화 흥행작은 여전히 길다. 볼거리와 긴장감, 재미를 유지할 수 있다면 긴 상영시간이 꼭 불리하게 작용하진 않는다는 뜻이다. 단, 톱10만 보면 2018년 130분, 2019년 127분, 2020년 124분으로 짧아지고 있다. 물론 작년 수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코로나로 개봉을 연기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20~30대가 이끌던 극장의 핵심 관객은 고령화로 곧 40대로 넘어갈 참이다. 극장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공연처럼 인터미션(중간휴식)도 없다.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일찍이 말했다. “영화의 길이는 인간 방광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