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신 풍속화 '야묘도추(野猫盜雛·들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자 남편이 장죽을 휘두르며 마루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그린 그림)'를 바탕으로 만든 일러스트. 아내를 두려워하면서도 공경했던 조선의 공처가를 상징하는 듯하다. /일러스트·편집 디자인=홍은주·김형재

소동파의 시에 ‘하동사자후(河東獅子吼)’란 말이 나온다. 하동의 사자가 울부짖듯 사나운 아내가 큰소리로 욕하는 것을 이른다. 소동파는 도인임을 자처하던 ‘용구거사(龍丘居士)’ 진계상이 고함치는 아내에게 벌벌 떠는 것을 보고 이렇게 빗댔다. “용구거사 처지는 딱하기도 하다네. 밤 새워 불법을 말하다가도, 문득 하동의 사자후를 들으면, 지팡이를 놓칠 만큼 정신이 아득해지네.”

유학의 본고장이라는 중국에서도 이럴진대, 조선의 남자들이라고 뭐 별수 있었겠는가. 소위 삼강오륜의 예법이 지엄하다던 조선 땅에도 예외 없이 엄처시하에 우는 남자들이 존재했다.

바람피우고 이부자리 찢겨 - 이조좌랑 지낸 이문건

우리가 아는 조선은 가부장 제도의 절대 권위 아래 ‘삼종지도(三從之道)’의 미덕이 뿌리 깊은 나라다. 하지만 이것은 임진왜란·병자호란 양란 이후 어지러운 사회를 지엄한 유교 기강으로 다잡으려 했던 조선 후기 모습일 뿐. 엄격한 윤리관과 예교의 가르침이 아직 사회 전반에 자리 잡기 전 조선 전기와 중기에는 이런 일도 종종 발생했다.

“아내가 지난밤에 해인사 숙소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물었다. 기녀가 곁에 있었다고 대답하니, 크게 화를 내며 욕하고 꾸짖었다. 아침에도 방 자리와 베개 등을 칼로 찢고 불에 태워버렸다. 두 끼니나 밥을 먹지 않고 종일 투기하며 욕하니 지겹다.”(이문건 ‘묵재일기’ 1552년 10월 5일)

성종 때 이조 좌랑, 승문원 판교 등을 지낸 이문건(1494~1568)은 아내에게 호되게 당한 일을 ‘묵재일기’에 남겼다. 조정 신료이자 사대부의 어엿한 가장이 처에게 욕을 먹고, 이부자리가 갈가리 찢기는 모욕을 당했던 것. 기녀와 하룻밤을 보낸 그가 원인을 만들긴 했다. 그래서 지레 제 발이 저렸던지, 단식투쟁과 육두문자로 질책하는 아내에게 꼼짝 못 했던 것이다. 대신 남몰래 일기에 그 속상함을 꾹꾹 눌러 담았다. ‘지겹다’는 소심한 반항과 함께. 어찌 됐든 그나마 이렇게 일기에 푼 것이 부부 관계에는 퍽 도움이 됐던 듯싶다. 1535년 11월 1일 시작돼 1567년 2월 16일에 끝나는 일기 곳곳에 아내에 대한 애정과 염려를 드러내며, 끝까지 살가운 부부 사이를 유지했으니 말이다. 그렇다 해도 이처럼 조선 시대에 사대부 가장의 체면을 제대로 구겨버리는 에피소드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화끈한 ‘막장 아내’ 내조 덕 - 영의정까지 오른 홍언필

위의 사례는 그나마 귀여운 편에 속한다. 단순한 부부 싸움에 그치지 않고 폭행과 학대가 오가고 피바람이 몰아치는 이런 살풍경도 종종 연출됐다.

“여원 부원군 송질에게는 딸이 셋 있었는데 모두 투기를 잘하며, 아비의 세력을 믿고서 남편을 매우 하찮게 여겼다. 그중 홍언필에게 출가한 딸은 홍언필이 간통한 여자의 머리털을 자르고 피투성이가 되게 구타하여 온몸에 성한 데가 없게 하였다.”(‘중종실록’ 28권 중종 12년)

송질은 연산군 때 이조·예조 참판 등을 역임했고, 중종반정 때는 공신으로 활약해 이조 판서와 우·좌의정을 거쳐 중종 8년(1513)에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렇게 잘나가는 친정아버지를 둔 세 딸은 하나같이 콧대가 높고 남편을 우습게 여겼다고 한다. 특히 홍언필(1476~1549)에게 시집간 딸은 성질이 꽤나 만만치 않은 이였다. ‘금계필담’에는 신혼 시절 남편에게 손을 잡힌 여종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에게 보냈다거나, 남편의 수염을 잡아 뜯었다는 일화도 실려 있다. 하지만 화끈한 아내의 남다른 내조 덕인지 홍언필은 인종과 명종 조에 영의정에 올라 이름을 떨친다. 그녀의 외아들 홍섬도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고, 부친 송질도 영의정 출신이니, 명실공히 영의정의 여인인 셈이다. 이 점으로 미루어 그녀를 둘러싼 루머란, 어찌 보면 영의정을 셋이나 거느린 여인이라는 희소성과 세간의 관심 때문에 더 부풀려진 점도 있었을 성싶다. 그만큼 그녀가 기세와 의지가 남다른 여장부였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거기에 하나 더. 귀책 사유는 간통한 자에게 있고, 영의정 반열에도 이름을 올렸으니 홍언필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않을까.

‘독수공방에 의처증’ 드러나 - 군수 자리 파직당한 홍태손

젊은 아내한테 추한 얼굴과 늙은 나이로 구박받고 멸시당하다가 급기야 이혼 소송을 제기한 수안군수 홍태손(생몰년 미상). 그가 사헌부에 심사를 요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씨는 성품이 본래 사납고 완악하여서… ‘어떻게 늙은 자를 남편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하며 못마땅해했다. … 또 욕하기를 ‘너는 추한 얼굴에 나이도 늙고 또 기력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혼인하여 나를 초췌하게 만드는가. 빨리 죽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중종실록’ 31권 중종 12년)

이 내용만 보면, 태손의 아내 신씨는 악처 중 악처요, 태손은 희대의 불쌍한 구박 덩어리 공처가였다. 사헌부는 곧 ‘패악한 신씨를 곤장 100대에 처한다’는 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모름지기 부부 일은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하는 법. 신씨는 반론을 제기한다. 홍태손은 오십이 넘은 나이에 후사를 보기 위해 새파랗게 젊은 그녀를, 그것도 세 번째 재취로 들여놓고 허구한 날 독수공방시키더란다. 게다가 자신과 여종 얘기를 엿듣기 일쑤, 여종의 남편을 질투하는 의처증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중종은 신씨의 처지를 충분히 참작하여 사헌부 판결을 뒤집었고, 사건은 두 사람의 ‘합의 이혼’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태손은 파직당한다. 집안 하나 못 다스리는 이가 어찌 고을 수령이 될 자격이 있겠냐는 상소 때문이었다. ‘제가(齊家) 실패’가 ‘치국(治國) 능력 부족’으로 확대 해석된 것이다. 공처가를 가장하며 혼인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려다 속내가 들통나는 바람에 ‘자가당착’에 빠진 자의 씁쓸한 말로라 하겠다.

자격지심 품고 밖으로 겉돈 -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

잘나도 너무 잘난 아내를 둔 탓에 본의 아니게 공처가가 된 이도 있다. 바로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1501~1561)다. 집안도 재주도 별 볼일 없던 이원수는 명문가 출신에 빼어난 재주를 지닌 아내에게 늘 자격지심을 느꼈던 것 같다. 신씨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다 쉰 살에 연줄로 겨우 관직 하나 얻은 처지였으니 말이다. 이이도 ‘선비행장’에서 모친의 고매한 인품, 뛰어난 그림과 학문 실력 등을 찬양한 반면, 부친에 대해서는 “성품이 활달하시고, 집안일에 무신경하셨다. 아버지가 실수하면 어머니가 옳은 길로 잘 이끄셨다” 정도로 간결하게 적었다. 한마디로 철없는 부친을 성숙한 모친이 잘 이끌었다는 것.

그는 끊임없이 바람을 피워 신사임당의 속을 썩이기도 했다. 상대는 술과 노름을 좋아하고 감정 표현이 과격한 주막집 여인 권씨. 모든 것이 신사임당과는 정반대인 권씨가 이원수의 콤플렉스를 달래주었던 걸까? 그는 아내가 죽은 후 권씨를 첩으로 들이기까지 했다. 이후 권씨는 맏이 이선과 불화했고, 이이는 가출까지 감행한다. 기실 사임당과 이원수의 어긋난 관계는 신사임당의 부친인 진보 학자 신명화의 시나리오에 기인한 바 크다. 신명화가 딸이 마음껏 재능을 펼치고 살도록 일부러 그저 그런 사위를 고른 것이다. 여하튼 자식을 일곱(4남 3녀)이나 두었고, 집안이나 능력 면에서 아내에게 대놓고 대들 처지조차 아니었지만, 이이가 오로지 신사임당의 아들로서만 전해지는 것을 보면, 이원수의 처지도 안타깝게 여겨진다.

20년 귀양살이 수발에 감사 - ‘자발적 공처가’ 유희춘

미암 유희춘(1513~1577)은 공처가를 자처한 케이스다. 재주 많고 기개 높은 아내 송덕봉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공(恐)처가와 경(敬)처가의 경계쯤이라고나 할까? ‘미암일기’에서 그는 을사사화 이후 제주도와 함경도의 20년 귀양살이 수발에, 자신 대신 모친의 장례며 가사 일체를 주관하며 가장의 공석을 채워준 아내에 대해 감탄과 공경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학문이 정밀하고 행실이 독실했지만 세상 물정에는 매우 어두웠다. 그래서 전답 매매나 집 수리 및 자녀 교육 등 생활 전반을 아내에게 의지했다. 또 눈치 없이 마냥 해맑기도 해서 뜬금없이 아내 속을 뒤집어 놓기도 했다. 한번은 희춘이 타지에서 “넉 달이나 혼자 잤다(독숙·獨宿)”고 뽐내는 듯한 편지를 썼다. 그러자 덕봉은 “예순의 나이에 혼자 잤다면 스스로 기운을 위해 이로운 것이지, 제게 은혜를 베푼 것은 아닙니다”라며 남편의 착각과 생색에 따끔하게 일침을 가한다. 그러면서도 “잘했다”며 어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유희춘은 ‘미암일기’에 “부인의 말과 뜻이 다 좋아 감탄을 금할 수 없다”거나 “내가 오늘 ‘유합’ 하권을 번역하면서 부인에게 많이 물어서 개정을 했다”고 적기도 했다.

그는 그저 아내에게 칭찬받고 싶고 아내를 존경하는 사내였다. 또한 가사의 주관자이자 저술의 동료로서 아내를 의지하고 존중했다. 그리고 아내의 질책과 비평도 기꺼이 수용하고 반성했다. 멋지도다! 아내에 대한 인정과 존중, 감사함으로 무장한 자발적 공처가 유희춘이여!

이영숙 박사

☞이영숙 박사는

중국 고전문학 전공자로 고전문학을 대중문화와 콘텐츠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해 왔다. 동아시아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사람·사랑·일상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겠다는 것이 목표다. 최근 저서 ‘사랑에 밑줄 친 한국사’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