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음악의 대모’가 돌아온다. 지난 2018년 서울시향 상임 작곡가에서 물러났던 작곡가 진은숙(60)이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으로 복귀하는 것. “아무런 직책 없이 작곡에 매달릴 때 가장 행복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가 은퇴 정치인의 ‘정계 복귀’ 선언처럼 마음을 돌린 이유가 뭘까. 다음 달 통영음악제 개막을 앞두고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는 그에게 지난 17일 전화를 걸었다.
진은숙은 “서울시향 일을 그만둔 뒤 더 이상 한국에서 일할 기회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통영 측에서 제안을 받고 1년간 꼬박 고민하다가 남편 권유를 받고 마음을 굳혔다”고 말했다. 핀란드 명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랄프 고토니의 아들인 피아니스트 마리스 고토니(42)가 그의 남편. 남편은 현재 노르웨이 스타방에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예술 기획 책임을 맡고 있다. 독일 베를린의 집과 노르웨이 직장을 오가는 ‘주말 부부’인 셈이다.
진은숙은 “남편이 ‘베를린에서도 한국의 젊은 음악인들에게 밥을 해 먹일 때 가장 행복하게 보인다’고 이야기하더라”고 말했다. 젊은 음악가들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대모 역할’에 어울린다는 의미다. 유럽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선우예권·조성진,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플루트 수석 김유빈, 노부스 4중주단 등이 진은숙의 ‘단골 식객(食客)’이다. 진은숙은 “김치찌개나 이탈리아 파스타, 중국식 사천 요리를 해주면 남기지 않고 싹싹 비운다”며 웃었다. 진은숙의 신곡 자랑이 아니라 ‘요리 자랑’이 조금은 낯설었다.
‘월드 클래스(세계적 수준)’만큼 남발되는 말도 없지만, 한국 예술계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월드 클래스’가 진은숙이다. 베를린 필·런던 심포니 같은 명문 악단에서 앞다퉈 그의 신작을 소개하고, 사이먼 래틀, 켄트 나가노, 정명훈 같은 지휘자들이 스스럼없이 애정을 드러낸다. 지난 1월 런던 심포니는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세계 초연했고, 지난해에는 베를린 필이 피아노 협주곡(협연 김선욱)을 연주했다. 그는 “지금은 3년 뒤에 독일 함부르크에서 초연할 신작 오페라를 작곡 중”이라고 했다.
골프와 피겨스케이팅 신동들이 ‘박세리 키드’ ‘김연아 키드’라고 불리는 것처럼, 한국 음악계에도 ‘진은숙 키드’로 꼽히는 작곡가가 적지 않다. 베를린 필의 카라얀 아카데미에서 수여하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작곡상’ 수상자 신동훈, 김택수 미 샌디에이고 주립대 교수 등이 그의 제자다. 진은숙이 서울시향 상임 작곡가로 머물렀던 12년간, 가장 애정을 쏟았던 분야가 20~21세기 작품 소개와 신진 작곡가 양성이었다.
진은숙은 “작곡에 점수나 순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제자들이) 모두 잘나가고 있다. 예전에는 해외로 나가서 혈혈단신으로 경쟁해야 했다면, 지금은 한국이나 아시아 젊은 예술가 사이에도 탄탄한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라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그는 통영국제음악재단(TIMF) 아카데미를 통해서 젊은 작곡가들을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올해부터 연주회 등 다양한 기회를 통해서 이들의 작품을 관객들에게도 소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터뷰에서 진은숙은 “일본과 대만에도 좋은 음악제가 적지 않지만, 행정적 지원과 공감대만 충분하다면 통영 역시 ‘한국의 루체른 페스티벌’ 같은 아시아의 대표 음악제로 성장할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고전과 현대 작품, 음악과 다른 장르의 안배가 그의 화두(話頭)다. 진은숙은 “실내악 앙상블이나 오케스트라에서도 고전적 작품들만 연주하는 시대는 지났다”며 “단지 귀로 듣는 연주회뿐만이 아니라 시각 예술·영화·공연 등 다른 장르에도 열려 있는 미래 지향적 페스티벌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