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조금 아끼면 아주 어려운 사람에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분들을 위해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사회 원로인 손봉호(84) 서울대 명예교수가 13억원 상당의 재산을 밀알복지재단(이하 밀알)에 기부한다. 그가 초대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던 밀알은 장애인 교육과 지원을 해온 복지 단체. 손 교수는 15일 본지 통화에서 “기독교인으로서 기부 사실을 떠드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도 “더 많은 분이 장애인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캠페인의 일환”이라는 것을 전제로 문답(問答)에 응했다.
손 교수는 “장애인들은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이고, 특히 가난한 나라 장애인들의 고통이 가장 크다”면서 “가난한 나라에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장애인들을 위해 써달라고 밀알 측에도 당부했다”고 말했다.
기독교에 기반한 사회 운동에 오랫동안 몸담은 그는 평소에도 크고 작은 기부를 실천해왔다. 손 교수는 “1980년대에 아프리카 말라위에 2000만원을 기부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 이름을 딴 큰 건물이 지어지더라”면서 “가난한 나라에 기부하면 그 쓰임새가 몇 배나 커진다”고 했다.
명예를 생각해 기부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행복보다 고통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며, 이를 위해 세상 가장자리에 놓인 이들의 고통에 주목해야 한다는 평소 지론에 따른 것. 손 교수는 “윤리학에서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나는 고통받는 사람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그들이 겪는 고통도 최소로 줄이는 ‘최소 고통’을 추구하는 것이 더 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가난한 나라의 장애인들을 위해 써달라고 밀알에 거액을 맡긴 이유를 설명했다.
손 교수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장애인 이동권 시위와 관련해서도 “장애인들이 평소 일상에서 겪는 불편과 고통은 시민들이 그들의 시위 때문에 출근길에 잠시 겪는 불편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면서 “우리는 이제 더 잘사는 것에 관심 쓸 것이 아니라, 가장 불편한 사람들이 덜 불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더 신경 써야 한다”고 했다.
거액의 재산을 기부한 아버지를 자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손 교수는 “오래 전부터 ‘유산 안 남기기 캠페인’을 해왔다”면서 “자식이 다른 사람 신세 질 형편만 아니라면 유산의 70%는 기부하자는 것이 나와 우리 가족의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특히 “돈을 모으려고 아낀 것도 아니고, 돈을 쌓아둔다고 그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다”면서 “고통받는 사람의 고통을 줄여주는 데 쓰는 것이 돈을 가장 가치 있게 쓰는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손 교수는 현재 그동안 맡은 대부분의 직함을 내려놓고 조선일보 윤리위원회 위원장과 환경 운동 단체인 푸른아시아 이사장, 나눔국민운동본부 이사장 직함 정도만 유지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일을 더 벌이지는 않겠지만, 평생 실천해온 환경 운동은 계속 이어갈 생각”이라면서 “환경을 생각하면 소비를 줄여야 하고 덕분에 돈을 아껴 기부도 할 수 있게 된 셈이니, 이번 기부는 환경 운동의 결과이기도 하다”면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