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우크라이나를 위한 연대’ 음악회. 공영 방송 ‘프랑스2′를 통해서 중계된 연주회에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노란색과 파란색 리본을 검은 원피스에 부착한 여성 피아니스트가 무대 중앙으로 올라왔다. 주인공은 조지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하티아 부니아티슈빌리(34).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협연한 데 이어서, 이번엔 프랑스 전 영부인이자 가수인 카를라 브루니의 반주를 자청했다. 브루니가 부른 곡은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화합을 염원한 샹송 ‘괴팅겐’. 부니아티슈빌리는 직접 마이크를 잡고서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을 사랑하지만 예술가로서 이번 전쟁에 항의해야 할 책무를 느낀다”고 말했다. 조지아어·러시아어·영어·불어·독어까지 5개 언어를 구사하는 그는 이날 방송에서도 능숙한 불어로 거침없이 발언했다.
예전 클래식 연주자들은 골방에 틀어박혀 연습에 매진하고 정치적 발언은 아끼는 것이 불문율처럼 인식됐다. 하지만 부니아티슈빌리는 그런 공식을 깨는 ‘행동파 음악인’이다. 2008년 러시아의 고국 조지아 침공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10여 년째 러시아 연주를 공개 거부하고 있다. 2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독주회를 위해 내한한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고 러시아 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야만적인 전쟁에 항의 표시를 하는 것이야말로 희생자와 난민을 위한 길이라고 여겼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이 끔찍한 건 민간인, 특히 아이와 여성들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돌아가기 때문”이라면서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존재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피해자의 관점에 서야 한다”고 말했다.
조지아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살 때 고국에서 첫 연주회를 열었던 영재 출신 연주자. 10세에는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한 살 터울의 언니 그반차도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자매 연주자’다. 그는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힘든 시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우리 부모님은 자매 교육을 챙겨주셨고 잠재력을 믿어주셨다”며 “그래선지 우리 자매는 비슷한 시기에 피아노를 시작했지만 질투심이 없다. 지금도 매년 10여 차례는 함께 무대에 선다”며 웃었다.
그저 주어진 레퍼토리가 아니라 ‘미로(Labyrinth)’ ‘만화경(Kaleidoscope)’ 같은 독특한 주제를 정한 뒤 어울리는 작품들을 선곡해서 음반을 펴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음반 ‘만화경’에는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처럼 회화적 성격이 강한 곡들을 담았고, ‘미로’에서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 음악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 아련한 추억을 환기하는 작품들을 연주했다. 그는 “감정과 추억, 이성과 감성, 현재와 미래에 대한 상상까지 우리의 머릿속은 미로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또 하나의 세계”라며 “바로크부터 영화음악까지 다양한 곡을 통해서 우리 정신의 복잡함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의 남다른 스타성에 주목하는 건 음악계만이 아니다. 배우 티모테 샬라메, 모니카 벨루치 등과 함께 프랑스 명품 브랜드 까르띠에의 ‘글로벌 대사’로 선정됐고, 최근에는 LG전자의 가전 모델로도 발탁됐다. 그는 모델 출연의 기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류애와 문화적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거나, 능동적이고 강한 여성상을 보여줄 수 있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