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브래드 피트와 에드워드 노튼을 주연 배우로 만든 ‘파이트 클럽’(1999)은 다중인격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 해리슨 포드가 신비의 고대 유물을 찾아 세계의 기기묘묘한 장소들을 섭렵하며 악당들과 싸우는 ‘인디아나 존스’는 유물 사냥꾼 영화들이 반복해 카피하는 원전과 같다. 그런데 다중인격을 가진 수퍼 히어로를, 그것도 가장 대중적인 히어로물을 만들어온 마블 스튜디오가 창조했다면?
마블 최초 다중 인격 수퍼 히어로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OTT 디즈니+를 통해 공개한 6부작 수퍼 히어로 시리즈 ‘문나이트(Moon Kight)’다. 지난달 30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딱 한 편씩만 공개하는데, 27일까지 근 한 달간 딱 하루를 제외하고 줄곧 디즈니+ 시리즈의 세계 1위(플릭스패트롤 기준)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모른다. 공식 예고편의 조회수만 벌써 3500만 회다.
고대 이집트 신화 마니아인 박물관 매점 직원 ‘스티븐(오스카 아이삭)’은 바보스러울 만큼 선량한 사람. 그에겐 남들에게 말 못할 비밀이 있다. 한 번 잠이 들면 처음 보는 장소에서 상처투성이로 깨어나기 일쑤다. 집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몸을 묶었는데도, 눈을 떠보니 알프스 산허리 풀밭에 쓰러져 있다. 마을은 미래의 죄를 미리 심판하는 고대 이집트 여신 ‘암미트’를 섬기는 컬트 집단의 본거지. 컬트 지도자 ‘아서(이선 호크)’가 스티븐을 용병이라 부르며 뒤쫓고, 설상가상 머리 속에서 ‘네 몸의 통제권을 내게 넘기라’는 거친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아이스크림 트럭을 타고 알프스의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추격전 끝에 집 침대 위에서 깨어났는데 이미 이틀이 흐른 뒤. 이번엔 스티븐의 직장인 박물관으로 이집트 벽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거대한 자칼이 습격해오고, 마침내 스티븐 안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인격, 현실의 죄를 심판하는 고대의 신 콘슈의 아바타 ‘문나이트’가 깨어난다.
‘문나이트’는 지금껏 등장한 어떤 마블 히어로와도 다르다. 동시에 가장 마블답다.
선악이 불분명한 ‘다크 히어로’는 마블 세계관에서 보기 드문 설정. ‘해리성 인격장애’를 가진 다중 인격 주인공이 정의와 징벌에 대한 서로 다른 관념을 가진 고대 이집트의 기괴한 신들과 엮이며 점점 더 깊어지는 혼돈 속을 헤맨다. 회를 거듭하며 점점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심판의 신 ‘콘슈’는 새의 두개골 모양의 머리와 거대한 낫을 들고 있다. 중세 종교화에서 보던 죽음의 신의 모습이다. 이런 정서는 배트맨과 조커처럼 양면성을 가진 DC 수퍼 영웅들에서 자주 보이던 특징이었다.
동시에 ‘문나이트’는 여러 면에서 마블의 흥행 공식도 영리하게 반복한다. 눈 한 번 깜빡할 때 마다 정신없이 시공간이 바뀌고, 다중 인격의 서로 다른 성격 탓에 벌어지는 실수와 유머가 끊임없이 폭소를 일으킨다. 태생이 어둡고 음침한 다크 히어로인데도, 자주 ‘토르’처럼 발랄하다. 정신병원에서 또 다른 자아와 도망치다 하마 얼굴에 깜찍한 목소리를 가진 이집트 신을 만나 비명을 지르는 지난주 4화의 엔딩은 화룡점정이었다. 상반되는 두 인격을 오가는 주인공은 브래드 피트의 ‘파이트클럽’을,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유머가 살아 있는 고대 유물 사냥꾼이라는 컨셉은 ‘인디아나 존스’를 연상시킨다.
스타워즈의 반란군 X윙 전투기 조종사 포 대머런으로 익숙한 배우 오스카 아이작은 ‘인히어런트 바이스’ ‘인사이드 르윈’같은 아트하우스 영화에서도 발군이었던 연기력 돋보이는 배우. 폭력을 극도로 싫어하는 박물관 직원,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CIA 첩보원 출신의 용병, 정체모를 냉혈한 악당까지 한 화면에서 여러 인격을 오가는데도 이물감 하나 없이 자연스럽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로 익숙한 이선 호크는 달콤한 로맨스와 핏빛 액션, 서늘한 스릴러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필모그래피의 배우. 눈 깜짝할 새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는 이 정신없는데도 이 시리즈의 집중력과 흡인력이 유지되는 건 그가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빌런’(악당)으로 딱 중심을 잡아준 덕분이다. 역시 좋은 배우들은 수퍼 히어로 망토를 입혀 놔도 좋은 배우다.
지나친 잔인함은 솜씨좋게 피해 가는 연출 덕에 12세 관람가. 가족이 함께 봐도 부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