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현지 시각) 공개된 엘리자베스 여왕 재위 70주년 기념 영상. 여왕이 패딩턴 베어와 차를 마신다는 설정으로 인터넷에서 뜨거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연합 AP

“전 비상용으로 마멀레이드 샌드위치를 숨기고 다녀요.” 패딩턴 베어가 빨간 펠트 모자에 숨긴 빵을 꺼낸다.

“나도 하나 넣고 있지. 여기!” 여왕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핸드백을 열어 샌드위치를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재위 70주년 축제인 ‘플래티넘 주빌리(Platinum Jubilee)’에 등장한 1분짜리 영상이 인터넷에서 뜨거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 4일(현지 시각) 런던 버킹엄궁 앞에서 열린 축하 콘서트의 인트로로 등장한 영상이다.

전례 없는 오랜 재임 기간으로 “따라야 할 가이드북이 없었다”고 여왕 스스로 토로한 역사적인 날, 70년 왕관의 무게를 견뎌온 그가 독대한 상대는 깜찍한 곰 인형이었다. 여왕의 깜짝 이벤트에 대중은 열광했다. BBC와 캐널 스튜디오, 헤이데이 필름이 합작해 만든 이 영상은 지난 3월 윈저 성에서 극비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패딩턴은 촬영 후 컴퓨터 그래픽으로 합성했다. 짧은 분량이었지만 영국 문화의 저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문화 콘텐츠였다.

왜 패딩턴 베어였을까. 패딩턴 베어는 1958년생인 영국의 국민 캐릭터. 영화화돼 세계적 인기를 끌면서 영국 대표 문화 상품이 됐다. 고루하고 비밀스러운 왕실 이미지를 희석시키면서 대중문화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영국의 면모를 보여주는 장치로 고른 것이 패딩턴이었으리라. 여왕에겐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 때의 경험이 학습 효과가 된 듯하다. 당시 여왕은 영화 ‘007′을 패러디해 본드걸로 변신했다. 제임스 본드 역 대니얼 크레이그의 호위를 받으며 낙하산을 펴는 듯한 퍼포먼스로 스타디움에 깜짝 등장했다. 권위적인 왕실 이미지를 깬 파격 퍼포먼스에 대중은 뜨겁게 환호했다.

여왕이 자신의 아이콘과 같은 검정 로너 백에서 마멀레이드 샌드위치를 빼내는 장면 /BBCㆍStudioCanalㆍ버킹검궁

장면과 소품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가 있다. 크림 티(cream tea) 장면은 전형적인 영국을 보여준다. 크림 티는 홍차, 스콘, 클로티드 크림(clotted cream) 등으로 구성된 영국의 가벼운 오후 식사로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의 약식 버전이다.

여왕이 빵을 꺼낸 가방은 그의 분신과도 같은 로너(Launer) 백이다. 여왕은 1950년대부터 로너사(社) 가방을 고수해 지금까지 200여 개를 가지고 있다. 로너 가방은 “왼팔에 걸고 악수할 때 핸드백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달라”는 여왕의 요청에 맞춰 끈 길이가 디자인돼 있다. 여왕이 70년 함께한 가방을 열어 보인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비밀의 성을 공개하는 것과 같은 상징이다.

1960년대 로너 핸드백을 든 엘리자베스 여왕./ Launer 홈페이지

영상의 화룡점정은 유머와 위트다. 영상 말미 자연스럽게 실제 콘서트로 넘어가면서, 왕실 근위병들은 영국의 전설적 그룹 퀸(Queen)의 ‘We will rock you’를 연주한다. ‘쿵쿵짝!’ 그 유명한 드럼 비트에 맞춰 여왕과 패딩턴은 찻잔에 스푼을 부딪혀 호응한다. ‘여왕’ 퀸이 ‘뮤지션’ 퀸과 만나는 것. 펀(pun·언어유희)으로 펀(fun·재미)을 즐기는 영국식 유머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패딩턴이 마멀레이드(marmalade·오렌지 잼)를 언급한 것도 여왕의 호칭 ‘Ma’am’을 유희한 것으로 해석된다.

유머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약간만 각도가 틀어져도 웃음 아닌 비웃음으로 돌아온다. 정신적 여유와 자신감, 공감력, 지적 교감에 뿌리 내린 고차원의 문화다.

유머의 달인으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여왕이 1991년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남긴 말이 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맙시다(Let us not take ourselves too seriously).” 70년을 버텨온 여왕의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