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손민수(46)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올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제자 임윤찬(18)을 처음 만난 건 5년 전이었다. 2017년 1월 한예종 부설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입학 오디션을 보러 온 당시 열세 살 소년 윤찬은 하이든 소나타와 리스트의 ‘메피스토 왈츠’를 연주했다. 그때 손 교수의 눈에 들어온 모습이 있었다. 손 교수는 19일 인터뷰에서 “음악적 완성도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 나이에도 전혀 당황하거나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흔들림 없이 음악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영재원에 입학한 임윤찬은 그때부터 손 교수의 제자가 됐다.
제자 임윤찬은 2019년 윤이상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일찍부터 ‘차세대 조성진’ ‘피아노 신동’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실은 지독한 ‘연습 벌레’라는 것이 스승의 귀띔이다. 손 교수는 “이번 콩쿠르 기간에도 윤찬이가 새벽까지 연습을 거듭한 뒤 궁금증이 남으면 문자로 보내는 일이 다반사였다”며 웃었다. 반 클라이번 역대 최연소 우승은 철저한 자기 주도형 학습의 산물인 셈이다.
평소 손 교수는 임윤찬에게 피아노 지도는 물론, 독서 리스트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손 교수는 “클래식 작곡가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던 괴테와 쉴러 같은 문호들의 작품과 시집을 추천했는데, 나중에는 윤찬이가 스스로 윤동주와 릴케·하이네의 시집을 찾아서 읽었다”고 말했다. 반대로 블랙홀에 대한 과학 기사들을 보내주기도 했다. 손 교수는 “음악이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예술이라면 마땅히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손 교수의 관심사가 이렇듯 기교 자체에 함몰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는 미국 보스턴의 명문 뉴잉글랜드 음악원 유학 시절에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명피아니스트 러셀 셔먼(92)을 사사했다. 셔먼은 음악 전반에 대한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음악은 9시부터 5시까지의 일과를, 돈에 대한 갈망을, 어리석은 욕망으로 인한 잠식과 한계를 거부한다”는 ‘피아노 이야기’의 구절이 대표적이다. 이들 사제(師弟)에게는 흠결 없는 기술적 완결성을 중시하는 한예종의 풍토와 셔먼의 인문학 정신이 공존하는 셈이다.
손 교수는 세 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고 10대 시절부터 국내 여러 대회에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한예종에서 손 교수를 가르쳤던 피아니스트 김대진 한예종 총장은 “지금의 임윤찬과 마찬가지로 손 교수도 고교 시절부터 음악계에서 스타 연주자였다”고 말했다. 손 교수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2008년. 눈길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오른손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부상 기간에도 왼손 연습을 거듭하다가 그 손마저 다치고 말았다. 그는 “양손 수술과 재활 때문에 거의 4년 가까이 연주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손 교수는 재활에 성공한 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32곡) 연주와 녹음에 나서며 복귀에 성공했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당시 부상과 재활 과정을 솔직하게 들려준다. 손 교수는 “삶은 아무리 최선을 다하더라도 인간의 힘으로 견뎌내기 힘든 고난이 찾아오게 마련”이라며 “그 순간만이 아니라 멀리 내다보면서 자신을 낮추고 겸허해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