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출판업을 했지만 책 한 권 찍는 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건 처음입니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출판사 대표 홍모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학술서를 주로 내는 이 출판사는 올 초 창립 이래 처음으로 양장본 제작을 두 달여간 중단했다. 홍씨는 “양장본 한 권 만드는 데 한 달까지 걸리니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면서 “속만 태우다 출판 극성수기인 1~2월이 지나고 나니 조금 숨통이 트여 겨우 다시 양장본을 내기 시작했다”고 했다.
“저자에게 원고 받는 일보다 책을 제작하는 것이 더 힘들다.” 요즘 출판인들이 입 모아 하는 말이다. 제작에 걸리는 시간이 한없이 길어졌다는 이야기. 책을 폈을 때 갈매기 모양이 되는 무선 제본은 최대 2주, 딱딱한 표지로 감싸진 양장본은 최대 한 달까지 소요된다. 작년 가을부터 본격화된 ‘출판 정체’가 있기 전엔 각각 3~4일, 일주일 정도면 제작 의뢰한 책을 출판사가 받아볼 수 있었다. 제작이 길어진 가장 큰 이유는 인쇄소와 제본소의 잇단 폐업이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인력 부족 문제가 도드라진다.
지난 6일, 경기 고양시에 위치한 A 인쇄업체. 인쇄 기술자 2명이 인쇄를 앞둔 디자인 책자의 색 온도를 조정하고 있었고, 수시로 드나드는 지게차들이 막 인쇄된 책들을 공장 밖으로 운반하고 있었다. 이 업체에선 인쇄 기술자를 구할 수 없어 작년부터 인쇄기 6대 중 1대는 아예 가동을 멈추고 있는 상태다. 이 인쇄소의 실장 홍모씨는 “인력 부족으로 생산량을 줄이게 됐다”며 “인력난에 종이와 잉크 등 원자재 가격 압박이 더해져 작년에만 인근 인쇄·제본소 30곳 중 6곳이 문을 닫았다”고 했다. 파주출판단지에 위치한 B 인쇄업체 관계자는 “코로나 이후 배달 업무 등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직종으로 인쇄 기술자들이 많이 옮겨갔다”며 “인근 인쇄소들의 인쇄 기술자 평균 연령은 50대 중반일 정도로, 채용 공고를 내도 지원하는 젊은 층이 없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출판사와 인쇄소 간의 전통적인 역학관계도 바뀌고 있다. 이전에는 인쇄소가 출판사에 거래를 요청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출판사가 자신들을 우선순위로 두고 빨리 책을 만들어줄 수 있는 인쇄·제본소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사계절 출판사 관계자는 “작년 주거래 제본소가 문을 닫아서 보조 업체로 물량을 모두 옮겨야 했다”며 “새 인쇄·제본소를 구하지 못해 업체를 소개시켜줄 수 있겠냐고 부탁한 출판사들도 있었다”고 했다.
인쇄물 수요의 지속적 감소로 인쇄업 규모는 꾸준히 줄었지만, 출판 관계자들은 작년 가을을 기점으로 특히 책 제작이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대한인쇄문화협회 유창준 이사는 “코로나 이후 지속적인 인력 유출에 더해 작년 하반기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50인 미만 사업장에 적용되며 공장 가동 시간이 줄어든 영향”이라고 말했다. 특근 및 주말 근무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제작 과정도 길어졌다는 설명이다.
제작 일정이 늘어질수록 제때 책을 팔지 못하는 출판사들의 시름은 깊어져간다. 유유출판사 조성웅 대표는 “올해 초 인기 연예인이 우리 책을 언급해서 책이 일시적으로 품절된 적이 있었다”며 “곧바로 다시 제작 주문을 넣었지만, 제작 일정이 밀리면서 결국 4일 동안 책을 팔지 못했다”고 말했다. 판매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 예상 판매 부수보다 많은 초판을 찍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한다. 사월의책 안희곤 대표는 “신간은 보통 1500부 정도를 찍지만, 제작 일정이 한 달까지 밀리는 경우가 생기니 미리 1000부 정도를 더 찍기도 한다”면서 “책 판매는 흐름이 중요해서 재고를 떠안는 위험 부담이 있어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이전의 출판시장 위기는 독자들이 책을 사지 않아 발생하는 ‘소비의 위기’였다면, 지금은 기본적인 도서 제작 인프라의 문제기 때문에 상황이 더 심각하다”면서 “무너지는 책 생태계를 살리기 위해선 인쇄 산업 차원의 지원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