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엔 ‘트렌치 코트의 비애’라는 말이 있다. 배우 알랭 들롱이나 험프리 보가트처럼 트렌치 코트 깃을 올리고 허리띠를 단단히 채우며 집을 나서는 상상만 해도 거리는 이미 런웨이다. 하지만 문제는 날씨. ‘가을 패션의 정석’이라며 트렌치 코트를 꺼내 입고 싶어도 막상 입으려면 덥거나 혹은 너무 춥다. 여름과 겨울만 남아버린 듯한 계절은 우리에게 멋부릴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일까.
요즘 소비자들에게서 나오는 불평도 비슷하다. 아침마다 ‘무얼 입어야 하나’로 고민하느라 때아닌 철학자가 되기도 한다. 10월이면 한창 ‘간절기 패션’이라며 니트와 카디건, 날에 따라 트렌치 코트까지 곁들여 입을 시기이지만 그러기엔 이미 초겨울. 18일 서울은 예년보다 열흘이나 빨리 첫서리가 내렸다. 일부 지역은 영하권으로 떨어지는 등 한파주의보까지 내려졌다. 그렇다고 한 겨울 패딩이나 코트를 꺼내자니 이른 선택 같다. 요즘같이 폭우에 비바람까지 치는 날에 코트를 입게 되면 보온 용도로 입은 게 맞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코트로 빗물이 스며들어 속까지 젖기도 하기 때문이다. 올겨울 혹한 예고에 어떤 ‘장비’를 옷장에 채워야 할지 마음은 더 급해진다.
2030 세대서 인기인 온라인 커머스 플랫폼 에이블리에 따르면 지난달 26일부터 지난 9일까지 경량 패딩, 누빔재킷 검색량은 각각 153%, 125%로 직전 2주 대비 급증했다. 같은 기간 뽀글이(플리스 소재)의 검색량도 70% 증가. 일부 브랜드의 경량 다운재킷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60% 이상 성장하기도 했다. 20년 넘게 해외 패션 브랜드 바이어를 지낸 이준석 패션 칼럼니스트는 “스타일도 살리면서 체온 유지를 위해 코트 스타일의 긴 바람막이가 인기”라면서 “보통 패딩류도 짧은 점퍼 스타일이 인기지만, 요즘같이 변덕스러운 날씨엔 코트 느낌을 내는 긴 스타일을 주목하면 좋다”고 말했다. 내부에 뽀글이(플리스) 소재를 덧대는 등 보온성도 높인다.
프랑스에서 우산 대용이라 불리는 패션 브랜드인 까웨를 비롯해, 영국의 바버, 국내 브랜드인 빈폴 등에서도 길어진 길이감의 외투가 대거 선보였다. 이미 군대템에서 ‘패션템’으로 자리 잡은 일명 ‘깔깔이’도 패션계 사랑받는 스타일이다. 트렌치 코트로 유명한 버버리와 영국의 멀버리 등은 깔깔이 스타일의 퀼팅 코트를 선보였고, 이탈리아 토즈, 프랑스 디올 등도 이번 겨울 패션으로 깔깔이 롱코트를 여럿 선보였다. 영국 패션지 글래머는 “매번 옷장을 채우는 게 부담스럽다면, 겹쳐입는 트렌드를 이용해 얇고 긴 코트 위에 카디건이나 짧은 패딩을 덧입는 방식도 멋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