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트로트 열풍’의 역사를 이야기 한다면, 요즘은 단연 ‘미스터트롯’과 ‘미스트롯’을 가장 먼저 꼽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까진 이 이름이 단골처럼 꼽혔다. 바로 ‘쌍쌍파티’. 1984년 김준규·주현미가 낸 이 트로트 메들리 테이프는 발매 직후 ‘길보드 차트(길거리 노점상 인기 차트)’에서 하루 1만 장씩 팔려 나갔다. 특히 서울 중구 필동에서 약국을 하다 다른 가수의 대타로 얼결에 녹음을 했던 주현미의 등장은 가요계의 큰 화제였다. 청량한 음색으로 간드러진 꺾기를 척척 구사하고, 세련된 미모를 갖춘 트로트 혜성으로, 주현미는 당시 발라드 붐에 밀려 주춤하던 트로트 인기를 단번에 ‘흥’의 대명사로 끌어올렸다.
최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주현미(61)는 “그만큼 최근 미스터트롯, 미스트롯 출신 후배들이 이끈 요즘 트로트 열풍을 보면 참 예쁘고, 내가 데뷔한 시절 또한 많이 떠오른다”며 웃었다. 올해로 데뷔 38주년을 맞은 그는 후배들 못지 않게 최근까지도 바쁜 음악활동을 이어왔다. 지난 10월 단독공연을 열었고, 오는 29일 오후 7시에는 서울 여의도 63컨벤션센터 2층 그랜드볼룸에서 ‘2022 주현미 디너쇼 12월의 러브레터’도 개최한다. 최근에는 버클리 음대 출신 재즈 뮤지션 필윤과 함께 ‘신사동 그사람’ ‘비 내리는 영동교’ ‘울면서 후회하네’ 등 자신의 대표곡은 재즈 편곡으로, 재즈 명곡은 자신의 스타일로 가창한 음원 10곡도 선보였다. 곧 음반으로도 엮어 낼 계획이다.
다만 주현미는 “트로트 붐을 더욱 키워가고 새 시도를 하는 건 후배들 몫이고, 내 몫은 선배들이 남긴 좋은 ‘전통가요’를 계속 선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2018년부터 유튜브 채널 주현미TV를 통해 선배 가수들의 곡을 꾸준히 불러 올리는 이유이다. 총 구독자 20만 명이 목전인 이 채널에서 ‘찔레꽃(원곡 백난아)’ 등 인기 영상은 조회수 200만회를 훌쩍 넘겼다. 주현미는 “베트남, 필리핀 등 해외 팬도 영어로 댓글을 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10대·20대 젊은 팬은 댓글 말고도 내 단독콘서트장까지 나타났다. 트로트가 인기긴 하구나 싶었다”며 웃었다.
주현미는 우리가 트로트를 ‘전통가요’로 보고, 계속 지켜 나갈 이유로 “우리 DNA에 콕 박혀 있고, 지워질 수 없는 민족 정서의 노래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100여년 넘게 이어진 장르이니 유행가 하나 하나에는 우리 역사의 장면이 담겼다”고 했다. “곡 ‘이별의 부산정거장’도 전쟁 때 남자가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친절한 경상도 아가씨를 만났겠죠. 그런데 서울이 다시 수복됐어. 올라가야 돼. 결국 부산 정거장에서 이별을 한거야. 이런 시대적 배경이 우리 트로트 곡들 속에 막 펼쳐 있는 거죠.” 그렇기에 “선배들의 이런 좋은 곡들을 되돌아 보지 않고 그저 남겨놓기만 한다면 너무 안타깝단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다만 임영웅, 영탁 등 후배 트로트 가수들이 해외 공연으로도 많이 진출하는 모습은 “정말 대견하다”고 했다. “제가 활동하던 때만 해도 해외 시장 진출이나 개척 개념이 아닌, 해외 교민들과 함께 웃고 우는 순회 공연이 대다수였죠. 여행 자유화 전이라 여권 받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요. 한번은 신인 때 (조)용필 아저씨랑 이주일 선배랑 해외 순회 공연을 가는데, 용필 아저씨가 “너 약사 면허증 안 갖고 왔냐. 그럼 비행기 못 타”라는 거예요. 그런데 깜빡 속았을 정도니깐.(웃음)”
그는 “트로트는 특정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몸으로 느껴야 하는 ‘정서의 노래’라 태생적으로 어려울 수 밖에 없다”고도 했다. “버클리 음대 나온 제 아들도 트로트 곡 하나만 써달라고 수 차례 했는데 안 된대요. 엄마 너무 어렵대요. 코드 네 개, 간단한 멜로디가 쓰이지만 음절 사이사이 특유의 필(feel), 맛을 살리는 게 쉽지 않은 거죠.”
또한 후배 가수들에게 “구닥다리 노래라 생각지 말고, 꼭 전통가요를 최소 50곡은 달달 외워뒀음 좋겠다”는 조언도 남겼다. “요즘 트로트 관련 방송이나 대회 심사와 지도도 자주 나가는데, 가서 시켜보면 선배들 곡을 서너 곡이라도 외우기는커녕 멜로디 흐름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더라”고 했다.
그만큼 “미스터트롯 출신 이찬원, 김수찬 같이, 유전자에 콕 박힌 것처럼 일관되게 트로트를 자기 스타일로 불러나가는 후배들을 보면 예뻐 죽겠다”며 주현미가 말했다. “적어도 가수로서 트로트 장르를 택했다면 단순히 ‘유행가를 부르겠다’는 생각만 하진 않았으면 해요. ‘맥을 잇는다’. 그게 진짜 우리 역할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