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볕이 들지 않는 할아버지의 서재는 내게 미지의 공간이었다. 천장에 닿을 만큼 높은 책꽂이에는 색 바랜 고서와 빳빳한 새 책이 두서없이 꽂혀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갱지 재질의 원고지에서는 무언가 쓰다 만 흔적이 자주 발견되었다. 나는 그 원고지를 찢어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 쓰기를 연습했다. 윌리엄 포크너, 제임스 조이스, F. 스콧 피츠제럴드, 유진 오닐. 평생 영문학을 공부하신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 이름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에서 가장 흔히 눈에 띄는 물건은 책이었다. 소파, 식탁 심지어는 화장실 변기 뒤에도 소설책이 쌓여있었다. 나와 동생은 그 책들을 몰래 들춰보며 자랐다. 초등학생이 알아서도 안 되고, 이해할 수도 없는 내용의 책이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걸 딱히 말리지 않으셨다. (사실, 우리가 뭘 읽든 별 관심이 없으셨던 것 같다.)

나는 성실하고 열정적인 독자였지만, 쓰는 사람이 되리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소설은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들만 쓸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첫 소설을 쓰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수없이 망설이고, 주저했다. 마침내 쓰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을 때, 재능은 없어도 누구보다 오래 인내하고 성실하게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가진 무기는 인내심과 성실함밖에 없다. 그것은 문학과 함께 가족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소중한 유산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

전지영

-1983년 포항 출생

-이화여대 기악과 중퇴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