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헌(57) 전 권투 국가대표팀 감독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이다. 상대 미국 선수 로이 존스 주니어(53)에게 판정승으로 승리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경기 직후 불거진 ‘편파 판정’ ‘한국 홈 텃세’ 논란으로 정신적 상처를 겪었고 이듬해 은퇴했다. 당시 그는 “경기에서 졌지만 판정에서 이겼다” “조국이 내 은메달을 빼앗아갔다”는 솔직한 말들을 남겼다. 26일 인터뷰에서 35년 전의 말들을 그에게 다시 들려주었다. 박 감독은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말들…”이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최근 개봉한 한국 영화 ‘카운트’의 실제 모델이 바로 박 감독이다. 영화는 선수 생활을 접고 고향 진해(현 창원)로 내려가 모교인 고교에서 체육 교사로 근무하면서 복싱팀을 만들던 시절을 담았다. 영화에서 배우 진선규가 주인공 ‘시헌’ 역을 연기했다. 박 감독은 “2005년쯤부터 제 사연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혹시라도 아이들에게 또다시 상처가 될까봐 간곡하게 사양했다”고 말했다. 그는 2녀 1남의 아버지다. 박 감독은 “옛 상처를 들추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자연스럽게 잊히기를 내심 바랐다”고 했다. 하지만 영화 제작진의 끈기도 권투 선수들 못지않았다. 박 감독은 “아이들이 20~30대가 되고 나서 물었더니 흔쾌히 좋다고 하길래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승자(勝者)가 되고서 감내해야 했던 사회적 비난의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박 감독은 “중고교 감독 시절에 제자들이 대회 판정에서 불이익을 받아도 차마 항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나 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챔피언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 영화도 당시 제자들과 함께 보았다. 그는 “창원에서 올라온 제자·현역 선수 등 10여 명이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흘리길래 따라서 펑펑 울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의 삶을 영화로 보는 기분은 어떤 걸까. 그는 “35년의 한(恨)이 씻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홀가분했다”고 말했다. ‘세월이 약’이라는 속담이 떠올랐다.
그는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뒤 지도자로 재기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총감독을 차례로 지냈다. 2019년부터는 서귀포시청 감독을 맡고 있다. 서울 올림픽 당시에 맞서 싸웠던 로이 존스 주니어와도 2021년 뒤늦게 재회했다. 박 감독은 “세르비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만났는데 서로 부둥켜안고서 울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후배 선수들이 당당하게 국제 무대에서 겨뤄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박 감독은 “아마추어와 생활 체육 인구는 꾸준하게 늘고 있지만, 한국 권투의 전성기였던 1970~1980년대에 비하면 국제 성적은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제 인생의 카운트도 아직 종 치지 않았다. 제자들이 메달을 따고 실력을 입증할 때까지 링에서 굳세게 버틸 작정”이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