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는 반드시 백발이 성성한 노장일까? 그렇게 생각했다면 최근 국내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고서 깜짝 놀랐을 지도 모른다. 30~40대 젊은 마에스트로들이 대거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젊은 피 수혈’은 정치권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현재 국내 음악계에서 세대교체가 가장 활발한 곳은 바로 지휘대다.

이병욱(48·인천시향 예술감독)을 필두로 최수열(44·부산시향), 정나라(43·공주시충남교향악단), 김건(42·창원시향), 홍석원(41·광주시향), 정헌(41·목포시향), 안두현(41·과천시향), 지휘자 정명훈의 셋째 아들인 정민(39·강릉시향)까지…. 최근 국내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이나 상임지휘자에 취임한 지휘자들은 대부분 30~40대다. 전국 국공립 교향악단 30여 곳 가운데 공석(空席)을 제외하면 절반이 넘는다. 예술감독이나 상임지휘자는 연주 곡목과 협연자 선정, 단원 선발 등을 책임지는 팀의 사령탑이다. 한국 오케스트라의 사령탑들이 대거 교체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 음악계의 체질 변화도 감지된다. 우선 좀처럼 연주하지 않던 20~21세기 현대음악이나 한국 작곡가들의 창작곡을 진취적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늘었다. 지난해 진은숙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협연 양인모)을 연주한 최수열 부산시향 예술감독이 대표적이다. 그는 2017년 부산시향에 취임한 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라벨 관현악 전곡 시리즈로 화제를 모았다. 올해 7월과 11월에는 예술의전당 현대음악 시리즈에서도 지휘할 예정이다. 최 감독은 “오늘의 현대음악이 내일의 고전이 되기 때문에 제2의 베토벤과 스트라빈스키를 찾아내기 위해 동시대 음악을 지휘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말했다.

교향곡·협주곡뿐만이 아니라 오페라·발레·디즈니 애니메이션 음악까지 지휘자들의 레퍼토리가 폭넓고 다양해지는 것도 최근 실감할 수 있는 변화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가수와 무용수들이 빛날 수 있도록 무대 아래의 오케스트라 피트(좌석)로 내려가는 ‘조연’도 기꺼이 자청한다는 의미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국립 음대에서 지휘를 공부한 이병욱 인천시향 예술감독, 인스부르크 티롤주립극장 수석 지휘자를 지낸 홍석원 광주시향 감독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감독은 “발레는 무엇보다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이고, 애니메이션 음악은 쉽게 들려도 관현악 편곡은 무척 정교하고 까다롭다. 다양한 장르와의 협업을 통해서 무엇보다 나 자신이 배우는 것이 많다”고 했다.

해외에서는 지휘자들의 연령이 20~30대까지 내려간 것과 달리, 국내에선 2000년대 초반까지도 뚜렷한 ‘세대교체’ 흐름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지휘자를 육성하는 부지휘자 제도와 지휘 워크숍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변화의 발판이 마련됐다. 프로 스포츠 구단에서 코치 생활을 거쳐서 감독으로 부임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다음 달 1~25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교향악 축제는 30~40대 지휘자들이 총집결하는 무대다. 1일 광주시향(지휘 홍석원)이 말러 교향곡 1번으로 축제의 문을 열고, 마지막 25일에는 부산시향(지휘 최수열)의 말러 교향곡 9번으로 폐막한다. 한국 지휘계의 ‘젊은 피’들이 축제를 열고 닫는 셈이다.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 탄생 100주년인 헝가리 작곡가 리게티의 작품들도 연주한다.

물론 앞으로 과제도 적지 않다. 여자경(51·대전시향) 박승유(36·양주시향) 같은 여성 지휘자들을 제외하면 국내 지휘계에선 아직 ‘남초(男超) 현상’이 강하다. 하지만 김은선(샌프란시스코 오페라극장 음악감독), 장한나(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상임지휘자), 성시연(뉴질랜드 오클랜드 필하모닉 수석객원지휘자) 등 해외에서 활약하는 ‘마에스트라(여성 지휘자)’들이 적지 않다. 또한 나이나 숫자를 넘어서 이들을 대표할 수 있는 음악적 화두도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부천 필 바이올린 부수석 출신의 음악 칼럼니스트 최은규씨는 “2000년대 초반 부천 필하모닉이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를 통해서 음악계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처럼 젊은 지휘자들을 아우를 수 있는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