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대한민국 수립 75주년이다.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 세계사에 유례없는 성장을 이룩했다. 그 치열했던 시간을 담은 현대사의 보물(寶物)을 발굴한다. 평범해 보이는 물건에도 개인의 기억과 현대사의 한 장면이 깃들어 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연극배우 손숙, 영화인 신영균, 만화가 이현세, 시인 신달자, 김장환 목사, 가수 김연자에 이어 박서보 화가의 ‘보물’ 이야기를 들어본다.

박서보 화백이 자택이자 작업실인 서울 연희동 ‘기지’의 정원을 배경으로 앉아있다. 옆에 쌓여있는 50여 권의 일기는 치열하게 살아온 화가의 흔적이 담긴 보물이자 한국 현대미술사의 소중한 기록이다. /이태경 기자

단색화 거장 박서보(92)는 한국 현대미술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태어나 1950년대 전위적인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었고, 1970년대 초부터 ‘묘법’이라 불리는 무채색 단색화 작업을 해왔다. “스님이 온종일 목탁을 두드려서 참선의 경지에 들어가듯” 연필로 끊임없이 선을 긋는 반복을 통해 정신을 수양하고 탐구하는 작업이다. 이 한국적 정신이 세계 미술계에 통했다. 10여 년 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해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장르이자 세계 현대미술의 주류가 된 단색화는 변방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대한민국의 성장과 닮았다.

1972년부터 매일 쓴 일기장

9일 오전 서울 연희동 기지재단에서 화가 박서보가 자신의 보물인 일기와 정원을 소개하고 있다. 2023.6.9 이태경기자

자택이자 작업실인 서울 연희동에서 최근 만난 화가는 일기장 50여 권을 쌓아 놓고 있었다. 1972년부터 어제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쓴 일기장이다. 그는 “평생 치열하게 살아온 나의 흔적이 담긴 보물”이라고 했다. “사람의 기억이란 왜곡되기 쉽고, 나이 들어 가면서 기억력에만 의존할 수 없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날 겪은 사실의 기록일 뿐이어서 건조하지만,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복판을 지나온 사람의 기록이니 의미가 깊을 겁니다.”

50여 권의 일기 가운데 1972년 7월의 일기./박서보 제공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현대미술사다. 가령 1972년 7월 28일의 기록. ‘1973년도 제8회 파리 비엔날레 공모전 접수/ 오후 1시30분경 이우환씨 서울 도착 예정/ 해외 작가 포상 대상 추천. 이우환, 김환기, 백남준, 김창열, 이성자, 이응노씨를 추천하다’라고 적혀 있다. “한 번은 내 작품이 옥션에 나왔는데, 옥션에서 진위를 가려달라면서 작품 앞뒷면 이미지를 보내왔어요. 작품 뒷면에 ‘XXX에게 선물로 이 그림을 준다. XXXX년 X월 X일’이라고 쓰여 있는 겁니다. 글씨가 도무지 내가 쓴 것 같지 않아서 그 날짜 일기장을 찾아봤어요. ‘XXX와 술을 많이 먹었다. 기분이 좋아 작품을 선물로 주다’라고 쓰여 있더군요.(웃음)”

1950년대 중반 정부 주도 국전 거부

최초의 연필 묘법 작품인 ‘Ecriture No. 6-67′(1967)/박서보 제공

시작은 혁명이었다. 박서보는 1950년대 중반, 정부 주도 국전을 거부하고 반기를 들었다. “홍대 다닐 때, 김환기 선생 권유로 국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어요. 극소수 작품 빼고는 전부 한 사람이 그린 것같이 보이더군요. 분기탱천한 20대라 한탄을 했지요. 일제강점기 지나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세대로서 어떻게 그림이 저렇게 저항정신이 없을 수 있냐고요.” 1956년 서울 명동 동방문화회관 3층 화랑에서 4인전을 열고, 소위 반(反)국전 선언문을 전시장 문 앞에 붙였다. 화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언 후에야 앞으로 나가야 할 작업의 방향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며 “큰소리치고 나면 책임을 지려고 더 세차게 노력하는 법”이라고 했다.

묘법 연작 'Ecriture No.060518' (2006) /박서보 제공

그의 대표작이자 단색화 초기를 상징하는 ‘연필 묘법’ 연작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왔다. “노자, 장자를 읽고 또 읽었어요. 책을 읽으면서 나는 서양 이론에 의한 화가였지, 기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요. 옛 선비들이 할 일 없어서 사군자를 친 게 아니에요. 정쟁으로 피폐해진 자아를 다스리기 위해 글씨를 쓰고 난을 친 겁니다.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맑게 걸러져요. 그런 세계관으로 나를 비워내야 한다는 것까지는 다가갔는데, 그걸 어떻게 표현할지 방법이 없어 고민이 깊었어요.”

다섯 살 난 둘째 아들이 형의 국어 공책을 펼쳐 놓고 글씨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종이가 구겨지고 제 맘대로 글씨를 쓸 수 없으니 짜증 내면서 연필로 죽죽 그어버리는 걸 보고, 아, 저거구나, 저 체념의 몸짓을 흉내 내 보고 싶어 만든 작품”이 최초의 연필 묘법인 ‘Ecriture No. 6-67′이다. 그는 “친구인 화가 이우환이 우리 집에 와서 우연히 이 작품을 보고 너무 좋다고 해서, 그의 주선으로 1973년 도쿄 무라마쓰 화랑에서 첫선을 보이게 됐다”며 “내 인생의 이정표가 된 보물”이라고 꼽았다. 그의 그림 중 최고가 작품도 연필 묘법이다. 1976년작 ‘묘법 No. 37-75-76′이 2018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200만달러(약 25억원)에 팔렸다.

“80세까지는 안 팔리는 작가였다”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 링크레벨 갤러리에서 8일 개막한 한국 현대미술 특별전 ‘기원, 출현, 귀환’의 전시 모습. 단색화 거장 박서보의 작품이 걸려 있다. /조현화랑

박서보는 지난 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당시 페이스북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고 덤덤하게 썼지만, 이날 그는 “매일매일 내 몸이 약해지고 있는 걸 체감한다. 무릎이 꺾이고 손이 떨려 연필 선이 달달거리는 심장 초음파 선 같을 때가 있다”고 했다.

자택이자 작업실 이름은 ‘기지’. 박서보가 미래를 위해 준비한 공간이기도 하다. 2016년 작은아들 내외와 함께 살 집을 찾다가 연희동 골목 언덕배기에 위치한 부지가 맘에 들어 건축가 조병수에게 설계를 맡기고 2년간 공사했다. 1층엔 화가의 작품이 걸린 전시실이 있고, 전시실에 맞닿은 정원에는 그가 직접 문경새재에서 골라온 숫바위와 암바위, 작은 바위들이 있다. “멋지게 가지가 뻗은 홍매화, 팝콘같이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는 능수매화, 비실이 분홍 매화나무 모두 하나하나 아내와 내가 만든 공간입니다. 얼마 전 우리 며느리에게 말했어요. ‘나 죽으면 묘지 가기 전에 정원을 휘 둘러보게 해달라’고요.”

“80세까지 안 팔리는 작가”였고, 단색화 열풍의 주역이 된 그는 최근 달라진 한국 미술의 위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내가 예전부터 늘 하던 소리가 있어요. 한국에 나 같은 작가는 길 가다 발에 챈다고. 우리는 늘 있었어요. 이제야 세계가 한국의 미술 수준을 알아본 거죠. 그런 작가를 알아보고 힘을 실어주려고 박서보재단(구 기지재단)이 미술상을 제정할 겁니다. 박서보 장학재단의 장학금을 받는 대학생들 전시도 기획할 거예요. 내가 죽어도 이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박서보재단이 애써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