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 때 샤이니의 ‘누난 너무 예뻐’ 영상을 친구가 보여줬는데 눈이 번쩍 뜨였어요. 나 이거 꼭 해야 해! 방과 후 소녀시대 등 K팝 안무, 노래를 따라 했죠. 저 그룹에 들어가면 난 어떤 포지션일까 상상했고요. 그렇게, 스물네 살 때 한국에 왔어요.”
흑진주처럼 잡티 하나 없이 피부가 까만 세네갈 출신 벨기에인 파투(28)는 또박또박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하루 네 시간씩 한국어 랩 연습, 한국인 친구들과 한국 드라마를 선생님 삼아 공부했다”고 했다. 새하얀 피부를 한 독일 국적 브라질인 가비(21), 미국 출신 앤비(24)가 “언니 나도”라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나도 중학교 때 BTS 노래 듣고 참 많이 연습했어.”(가비) “난 원어스.”(앤비) 그러자 인도인 스리야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다 같은 경험을 했네!”
이들이 속한 4인조 걸그룹 ‘블랙스완’은 지난해부터 “한국인이 하나도 없는 최초의 국내 데뷔 K팝 걸그룹”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룹 전신은 본래 한국인 멤버와 태국, 베트남 출신들이 섞인 다국적 걸그룹 ‘라니아’. 하지만 계속된 멤버 탈퇴로 2020년 한국인 멤버 세명과 베트남인 레아, 파투로 멤버를 정비해 ‘블랙스완’으로 재데뷔했고, 결국 한국인 멤버들은 그룹을 전부 다시 떠났다. 지난해 가비, 스리야, 앤비가 합류했고, 레아는 건강상 이유로 활동을 중단하면서 지금의 4인 활동 체제가 됐다.
다사다난한 그룹 사정에도 현 멤버들의 활동을 지탱한 건 ‘K팝에 대한 선망’이란 공통 경험이었다. 이들의 거주지였던 벨기에, 미국, 브라질, 인도에서 한국까지 거리를 더하면 약 4만2000㎞, 지구 한 바퀴 거리. 그 먼 거리를 돌아 한국으로 오게 된 계기도 ‘K팝에 대한 두근거림’이었다. “중학생 때 인간관계 때문에 극단적인 생각을 할 만큼 힘들었는데 K팝이 제겐 에너지, 친구가 되어 주었죠.”(파투)
일부에선 이들에게 “도대체 왜 K팝이냐”고 묻는다. 최근 가요계에선 “한국인 없는 그룹을 정말 K팝 그룹이라고 할 수 있냐”는 논쟁도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어로, 멋진 노래와 춤을 동시에 보여주면 그게 K팝.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할까”라며 반문했다. 인도에서 자국 전통 춤과 현대무용을 공부했고, 발리우드 백댄서 준비를 했었다는 스리야가 말했다. “격렬한 안무와 노래를 동시에, 멋지게 선보이는 K팝 무대를 처음에 보고 깜짝 놀랐어요. 발리우드는 사실 노래, 춤추는 영역이 다 분리돼 있거든요. 새 가능성을 찾은 느낌이었죠.”
쉽기만 한 선택은 아니었다. 활동 초기 얼굴 톤에 맞는 화장법을 찾느라 메이크업 숍도 전전했다. 가비는 “파투 언니는 숍에서 가장 어두운 색, 전 가장 밝은 색을 발라야 하는데 화장품 자체가 없었다”고 했다. “K팝 정체성은 당연히 한글”이란 생각으로 공부 중인 한국어도 “존댓말, 일상 표현도 아직은 어려운 게 많다”고 했다. 파투는 “다른 멤버들은 그래도 책으로 한국어를 배워 존댓말이 괜찮은데, 난 친구들에게 배운 게 문제”라며 “방송 미팅 중 PD님에게 반말을 할 뻔해서 대형 사고를 칠 뻔했다”며 웃었다. 다만 스리야는 예외. “인도어에는 존댓말이 네 가지나 있거든요. 우리끼리, 한 살 어린 사람, 높은 사람, 공식석상 말투가 다 다르죠. 한국은 그래도 하나라서 다행이더라고요.”
이들은 지난달부터 대부분 가사가 한국어인 신곡 ‘카르마(Karma)’를 선보이고 있다. 특히 스리야의 고향인 인도 문화를 K팝 스타일 곡과 안무에 접목한 형태로 선보여 호평을 받았고, 인도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뮤직비디오 조회 수가 1200만회를 넘겼다. 오는 9월부터 일본,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등 6국 투어 공연도 앞두고 있다. 목표는 “피부색이 달라도 K팝을 할 수 있다는 걸 알리는 ‘화합(unity)’의 상징 같은 그룹”이 되는 것. 파투가 말했다. “무엇보다 ‘역시 블랙스완’이란 수식어를 얻고 싶어요. 저희는 정말 실력이 좋은 팀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