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석이가 요즘 회의하고 시(詩)를 보내요.”

연상호 감독은 "작품을 만들 때 갖고 있는 믿음은 없다. 다만 넷플릭스 같은 매체가 떠오르면서 기존 영화 산업에서 통하던 게 어떻게 달라질지 고민이 있다"라고 했다. /박상훈 기자

연상호(45) 감독이 놀리자, 최규석(46) 만화가가 “무슨 시를 보내, 어? 캐릭터의 내면 세계를 쓴 거지”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최근 만화책 ‘계시록’(문학동네) 출간을 맞아, 서울 마포구 연 감독의 작업실을 찾았다. 휴식차 경남 창원에서 지내는 최 만화가는 줌으로 함께했다. “연상호가 사건 개요를 보내면, 저는 인물의 내면에 대해 이야기해요. 특히 빌런의 내면을 생각하다 보니, 현학적인 글을 보내게 되네요.”(최규석) “그 내면 세계를 어떻게 반영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연상호) 웹툰 원작 드라마 ‘지옥’으로 2021년 넷플릭스 글로벌 1위를 차지한 둘의 비결은 ‘잡담’에 있는 듯했다.

‘계시록’은 연상호와 최규석의 ‘지옥’ 이후 두 번째 합작이다. 작년 웹툰으로 연재한 걸 책으로 묶어냈다. 상명대 서양화(연상호)·만화학과(최규석) 96학번으로, 대학 시절부터 어울려 놀던 둘은 서로의 과거를 기억한다. 한때는 매일같이 전화하며 작품에 대해 말할 정도. 연상호는 1000만 관객 영화 ‘부산행’(2016)에 이어 ‘지옥’ 흥행에 성공하며 최고 주가를 달리고 있지만,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 이전의 삶은 달랐다. “제 눈엔 연상호가 지닌 재능이 보였는데, 안 풀리는 기간이 길어서 너무 답답했습니다. 이제는 너무 잘 풀려서, 저러다 죽는 거 아닌가 걱정되지만요.”(최규석) 최규석은 대학 때 작품 활동을 시작해, 부천만화대상(2018) 수상작인 ‘송곳’을 비롯해 현실 비판적 만화를 다수 발표했다. “규석이는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만화 영재였죠. 서로 긴 시간 동안 문화나 사회적 관점을 공유했기 때문에,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제 생각을 알아냅니다.”(연상호)

최규석 만화가는 "'지옥'의 협업을 제안받았을 때, 어릴 때부터 재밌게 봤던 장르물을 만들 수 있겠다는 기대가 컸다. 리얼리즘 만화를 줄곧 그렸지만, 뼈를 묻겠단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장성용 사진가 제공

‘계시록’은 각자의 믿음에 사로잡힌 인물들의 이야기다. 자신이 사람을 죽인 것이 신의 계시라고 믿는 교회 목사와 죽은 여동생의 환영을 보는 형사 등이 충돌하며, 믿음 앞에서 나약해지는 인간의 맨얼굴을 그린다. 연 감독은 사이비 종교 단체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 ‘사이비’(2013)를 언급하며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때보다 확실한 엔딩을 맺고 싶었다”고 했다. ‘인간의 연약함’은 연 감독이 수년 전부터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지옥’에서 지옥행 통보를 종교의 형태로 이해하려는 것처럼, ‘계시록’도 어떤 사건에 대해 인과성을 만들려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다룬 것입니다.”(연상호) 실제로 ‘계시록’은 다음 달 발표 예정인 웹툰 ‘지옥’ 시즌2의 회의 도중 잡담에서 시작된 만화이기도 하다. 최 만화가는 “의미 부여 중독에 빠진 인간들을 그려내려 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는 걸 (독자가) 인식했으면 한다”라며 “이번에는 ‘지옥’보다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이야기다 보니까, 더 선명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했다.

만화 '계시록'의 부분. /문학동네

둘의 작업 스타일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연 감독이 사건 개요와 장면 구성을, 최 만화가가 논리 구조와 인물을 주로 담당한다. 연 감독의 아이디어는 톡톡 튀는 동시에 현실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최 만화가는 “연상호는 신선하면서, 그 안에 주제 의식이 응축된 사건을 덩어리 형태로 던진다. 논리적인 구상을 좋아하는 제가 그 덩어리를 쪼개고, 연상호가 피드백을 해주며 서로의 생각이 구체화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연 감독은 “규석이와 함께라면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고 했다. “영상화를 전혀 생각 안 하고, 소년 만화를 그려 보고 싶어요. 만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니까요. 더 늦기 전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