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주위에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입맛은 제각각이고 위스키 종류는 수천 가지. 본인의 취향만 알아도 선택지는 반으로 줄어듭니다. 주정뱅이들과 떠들었던 위스키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당신의 취향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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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하고 쌀쌀한 4월의 어느 날, 시계 종이 10시를 알리자 마트 게이트가 열리고 100여 명의 인파가 동시다발적으로 목표물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순간에 현장은 몸싸움과 욕설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른 인파가 일제히 손을 뻗자, 물건들이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빈 상자들만 공중에서 날아다녔습니다. 그 와중에 소정의 목적을 달성한 이들은 럭비 경기를 방불케 하듯,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현장을 거칠게 빠져나갔습니다. 해당 제품이 완판까지 걸린 시간은 단 3분.
서울 시내 한 대형 마트에서 일어난 오픈런 현장 모습입니다. 고객들을 불러 모은 제품은 싱글몰트 위스키인 맥캘란 12년, 셰리 오크. 위스키 열풍이 불며 가격이 18만원 수준까지 치솟은 제품이 10만원대 초반에 출시됐다는 소식에 이른 시간부터 고객들이 매장을 찾은 것입니다. 제품은 완판됐지만, 현장 통제 부족과 한국인들의 열광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비판이 나오며 하나의 촌극으로 기록됐습니다. 한때 10만원 이하로 입문용 셰리 위스키를 찾던 지인들에게 추천해 준 위스키가 이제는 운과 강한 체력을 요구하는 위스키가 돼버렸습니다. 한국인들의 셰리 사랑은 남다릅니다. 위스키보다 와인이 먼저 인기를 끌었던 탓일까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셰리 위스키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셰리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헤레스(Jerez) 지역에서 자란 팔로미노라는 청포도 품종으로 만든 주정 강화 와인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피노(Fino), 아몬티야도(Amontillado), 올로로소(Oloroso), 페드로 히메네스(Pedro Ximenez) 등이 있습니다. ‘셰리’는 원산지 명칭 보호에 포함돼 있어 공식적으로 셰리 라벨이 붙으려면 반드시 카디스(Cádiz)주의 ‘셰리 트라이앵글’에서 생산된 제품이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셰리 위스키는 셰리 와인을 병입하고 남은 오크 통에 위스키를 넣어 숙성시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셰리 특유의 건포도, 과일, 고소한 견과류 등의 풍미를 얻게 됩니다.
◇솔레라 시스템
셰리는 ‘솔레라 시스템’이라는 블렌딩 방식으로 맛과 향을 일정하게 유지합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파이프로 연결된 오크 통을 피라미드 형태로 층층이 쌓아두고 아랫줄로 갈수록 오래된 술을 담습니다. 가장 오래된 술을 일정량 병입하면 위층에 있던 술들이 아래로 내려와 섞이고, 맨 윗단의 빈 곳은 다시 새 와인으로 채우는 방식입니다. 셰리 와인 규정상 한 번에 1/3 이상의 와인을 꺼낼 수 없어 오크 통이 완전히 비워질 일은 없습니다. 솔레라 방식 특성상 한번 쓴 오크 통은 버리지 않고 계속 사용합니다. 오히려 쓰면 쓸수록 셰리 와인의 질을 향상시켜 주는 효모가 많아져 오크 통의 가치가 올라갑니다. 길게는 100년 이상 사용되는 오크 통들도 있다고 합니다. 조선의 ‘씨간장’이 수백 년을 면면히 이어올 수 있는 ‘덧장’ 문화와도 방식이 유사합니다. 매년 새로 담은 햇간장을 조금씩 더해 ‘씨간장’의 맛과 양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요.
◇운송용 셰리 오크 통의 시작
시장에 익숙히 알려진 ‘진짜’ 셰리 위스키는 과거 운송용 오크 통에서 숙성된 위스키에 기반을 둡니다. 근데 지금은 이 통들이 다 사라지고 셰리 위스키를 만들려고 인위적으로 제작한 오크 통들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통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내막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야기는 영국이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서 패하면서 시작됩니다. 당시 와인 사랑이 남달랐던 영국이 무역의 주요 거점인 보르도항을 빼앗기고 새롭게 찾은 와인 공급처가 포르투갈입니다. 하지만 와인은 저온 장치도 없이 2000km 넘는 뱃길을 견디기엔 너무나도 약한 존재였죠. 이때 와인이 산화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브랜디를 섞어 알코올 도수를 높인 것이 주정 강화 와인의 시초입니다. 오크 통에서 와인이 발효되고 숙성되는 과정에 브랜디를 섞는 순간 효모가 죽고 발효가 멈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이때부터 영국에서 셰리 와인이 인기를 얻고 옆 나라 스페인까지도 본격적으로 셰리 와인을 영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합니다.
19세기 말까지 셰리 와인은 유리병이 아닌 오크 통째로 옮겨졌습니다. 당시 와인이 운송되기까지 길게는 몇 달이 걸렸기 때문에 배송이 끝날 무렵 오크 통이 흡수한 셰리의 양이 수십 리터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때 오크 통의 효율도 문제였지만, 운송을 마친 업자들에겐 빈 오크 통도 짐이다 보니, 결국 인근 스코틀랜드 증류소에 헐값으로 처분합니다. 하지만 셰리 업자들도 눈 뜨고 귀한 자산이 낭비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결국 배송에 쓰이던 오크 통은 시간이 흘러 효율이 좋은 스테인리스로 대체됩니다. 급기야 1986년 셰리 와인의 병입은 무조건 산지인 스페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법령이 생기면서 운반용 셰리 캐스크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팍사레트
영국에서 셰리 위스키의 인기가 식자 자연스럽게 셰리 오크 통 물량도 줄어듭니다. 당장 셰리 위스키에 쓸 오크 통이 부족해지자 조급해진 증류소들이 가짜 셰리 오크 통을 제작하기에 이릅니다. 미국에서 들여온 나무로 제작한 오크 통에 화학물질인 팍사레트(Paxarette)를 발라 셰리의 풍미를 증폭시키는 방법이었죠. 팍사레트는 셰리 와인 중에서도 가장 당도가 높은 페드로 히메네스와 시럽 등을 졸여 만든 화학물질입니다. 하지만 1990년부터 스카치 위스키 협회(SWA)에서 이를 위스키 고유 풍미에 영향을 주는 첨가물로 판단하고 금지합니다. 간혹 1980~90년대 생산된 올드 셰리 위스키들이 유난히 더 맛있는 이유를 팍사레트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현대의 셰리 캐스크
증류소 입장에서 솔레라 시스템을 직접 구축해 셰리를 생산하는 방식은 수지타산이 안 맞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솔레라 방식에 쓰이는 것과 유사한 종의 나무로 맞춤형 오크 통을 제작하는 방식을 택했죠. 이렇게 제작된 오크 통들은 헤레스 지방의 셰리 와인 양조장으로 보내져 평균 18개월 정도 숙성을 거칩니다. 즉 오크 통에 셰리 와인의 풍미를 입히는 시즈닝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규정상 셰리로 부르기 어려운 와인이고 음용을 위해 만든 술이 아니다 보니 두어 번 오크 통에 재사용 후 폐기하거나 식초로 재가공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위와 같은 연유로 최근 출시된 맥캘란 제품들의 라벨에도 ‘Sherry seasoned oak from Jerez Spain’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옛날 방식 vs 현대 방식
운송에 쓰인 셰리 오크 통과 맞춤형으로 시즈닝된 셰리 오크 통의 기본 틀은 비슷합니다. 양쪽 다 일정 기간 셰리 와인을 담고 있었다는 점이죠. 하지만 시판용 고숙성 셰리 와인을 담고 있었던 오크 통과 간신히 구색만 갖춘 와인을 담갔다가 뺀 오크 통 간의 괴리는 커 보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도 양질의 셰리를 묵힌 오크 통을 활용해 좋은 평가를 받는 셰리 위스키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과거 운반용 오크 통과 비슷한 품질을 보여주겠지만, 가격도 그만큼 높아질 것입니다.
뭐가 맞고 틀리는지는 생산자의 목적 그리고 소비자의 기호에 따라 갈릴 것입니다. 셰리의 풍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면 실제 셰리 와인을 마셔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평소 알던 셰리 위스키에서 느꼈던 부분들이 더 직관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맥캘란 12년 셰리가 구하기 어렵다면, 비슷한 가격대의 글렌드로낙 12년도 좋습니다. 올로로소 셰리와 페드로 히메네스를 사용해 달콤한 건포도와 과일의 풍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진한 초콜릿과 건포도의 뉘앙스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글렌알라키 15년도 쌀쌀한 날씨에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보틀 구매 전 바에서 잔술로 미리 마셔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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