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을 잡는 고려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지승현)의 엄지와 검지엔 피딱지가 굳은살처럼 단단하게 붙었다. 거친 활줄이 손가락 깍지(시위 당기는 기구)를 튕길 때, 양규 손에 흐르던 진물은 그가 쏜 불화살 촉처럼 활시위를 붉게 물들인다. 7일째 이어진 사투. 흥화진(興化鎭·현 평안북도 의주군) 성벽 방패는 거란군의 화살로 이미 빽빽하다. 40만 대군을 앞세운 거란군은 생포한 고려 백성을 인간 방패 삼아 성벽으로 진격한다. 눈 붙일 틈도 없이 꼿꼿한 자세로 전열을 살피는 양규의 부르튼 입술과 퀭한 낯빛이 치열한 전장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KBS 대하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흥화진 전투를 지휘한 양규 장군 역의 배우 지승현이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7일간의 사투로 부르튼 입술 등이 사실감을 높인다. /KBS
피딱지로 범벅된 '고려 거란 전쟁' 양규 장군의 손/KBS

지난 26일 방영된 KBS 2TV 대하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6화. 1010년 거란의 침략에 맞선 7일간의 흥화진 혈전이 펼쳐진 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등엔 ‘이것이 정통의 맛이다’ ‘오랜만에 몰입해서 봤다’ ‘선조들의 패기와 지혜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수적 열세를 딛고 수성전(守城戰)을 승리로 이끈 양규 역을 맡은 배우 지승현에게 ‘연기 대상감’이란 호평도 쏟아졌다.

‘고려 거란 전쟁’은 최근 퓨전 판타지극 홍수 속에 ‘정통 사극’을 택했다. 2016년 방영된 KBS 대하사극 ‘장영실’ 이후 5년 만에 부활한 ‘태종 이방원’(2021)이 종영한 후 1년 6개월여 만에 돌아온 정통 사극이다. 드라마는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이라 불리는 강감찬의 ‘귀주 대첩’을 1화에 살짝 녹인 뒤 10년 전으로 돌아가 ‘승전국’ 고려 영웅들의 모습을 그린다.

거란의 지속적인 공세로 이어진 30년 전쟁에서 승리의 획을 긋는 양규의 흥화진 전투부터 7회에 이어진 강조(이원종)의 삼수채 전투 등 그간 공중파 드라마에서 덜 다뤄진 역사와 그 주역들을 조명한다. 5~6화에서 거란의 공성전(攻城戰)에 맞선 양규는 ‘맹화유’(맹렬히 타는 기름)가 든 항아리를 날리며 거란의 투석기를 파괴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한 함정인 ‘함마갱’을 설치해 인해전술로 밀려드는 거란군에 맞선다.

흥화진 전투 중 밥풀도 떼지 못하고 전투에 나서는 병사.

시청률도 화답했다. 첫 회 5.5%(닐슨 전국 기준)로 시작해 지난 6회 7.8%로 상승세를 타더니, 2일 방송된 7회는 8.4%로 자체 최고를 경신하며 동시간대 드라마 시청률 1위에 올랐다. 또 KBS 대하 사극으로는 처음으로 넷플릭스에서 동시 공개하면서 넷플릭스 한국 일간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다각도로 고증한 장면도 눈길을 끈다. 실제 제작한 국궁을 연습해서 국궁 사법으로 활을 쏘는 전투 신이 대표적이다. 제작진은 고려의 비밀 병기인 ‘검차(劍車)’를 표현하기 위해 조선 시대 병법서인 ‘풍천유향’과 여러 문헌을 검토했다. 드라마는 고려군 사이 일렬로 모습을 드러낸 검차진과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거란 기병대를 교차 편집해 긴박감을 높였다. 두려움으로 눈 초점이 흐려진 거란 기병대의 말이 멈춰서는 모습만으로도 검차의 위용과 고려군의 용맹을 짐작하게 했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인간미를 넘어선 인간력(力)에 있다. 거란의 ‘타초곡(打草穀 ·말먹이와 곡식 등을 포함한 약탈)’에 대해 강감찬(최수종)이 “그들이 타초곡을 하는 최종 목적은 사람”이라고 말하듯, 백성을 가장 중시하는 내러티브가 극 전반에 깔려 있다. 강감찬을 정치 스승으로 두고 혼란한 정세를 안정시키고 민심을 잡은 고려 임금 현종(김동준)의 성장기도 볼거리다. 숱한 전투에도 불사신처럼 말끔한 여느 영화 속 장군 대신 거무튀튀한 몰골로 병사들을 재우면서, 거란군을 죽이기 위해 고려 포로까지 죽일 수밖에 없는 고뇌의 순간에 눈물을 흘리는 인간 양규가 있다.

병사들 역시 그저 죽어나가던 여느 드라마와는 달리, 밥 먹다 밥풀 묻힌 채 활을 쏘고, 바가지로 물을 서로 먹이며 끝까지 싸운다. 백성도 성까지 화살을 들고 나르길 마다하지 않는다. 흥화진 전투 장면을 연출한 김한솔 감독은 “양규 장군을 보면서 네 번 울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