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헌, 'P22049-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2022). 린넨에 유채, 112x145cm. /학고재

화면에서 지지직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김영헌(60)의 회화는 옛날 브라운관 TV의 조정 화면이나 모니터 노이즈를 연상시킨다. 붓과 칼을 함께 써서 만들어낸 독특한 질감의 색면 그라데이션이다.

서울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리는 ‘김영헌: 프리퀀시’는 뉴욕과 파리, 홍콩 등을 주무대로 활동해온 화가의 신작 22점을 선보인다. 다채로운 색의 물감을 붓으로 한 번에 바르고, 칼로 긁고 베어내 급작스럽게 단절되는 느낌을 연출했다. 작가는 “붓이 아날로그적인 부드러움을 상징한다면 날카로운 칼은 디지털적 속성을 나타낸다”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복잡하게 뒤섞인 지금 세상을 표현했다”고 했다. 그래서 전시 제목도 ‘프리퀀시(주파수)’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이 주파수가 맞아 화음이 되듯, 회화에서도 노이즈와 보색, 상극이 어우러져 놀라운 시각적 경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김영헌, 'P23043-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2023). 린넨에 유채, 100x80cm. /학고재

아날로그적 풍부함과 단칼에 끊기는 급격함이 교차하며 화면을 완성한다. 대부분 선과 선이 수직이나 수평으로 만나는 작품이지만, 유일하게 나무의 나이테나 물결처럼 동심원의 파장을 이루며 퍼지는 그림이 있다. 중심부에서 서로 대비되는 색들이 방사(放射)하면서 충돌과 화합을 끝도 없이 거듭한다. 어릴 적 낚시를 하다 겪은 신비한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찌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시선이 물결로 옮겨 갔고, 끝없이 오가는 물결을 응시하다 급기야 시간과 공간이 미묘하게 왜곡되고 변화하는 전율을 체험했다. 이때의 경험이 반영돼 내 작품은 충돌 속에서 조화를 찾는다.”

1995년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받고 2020년 하인두 미술상을 받았다. 초기엔 설치 작업에 주력하다 영국 유학 후 회화로 전향했다. 그는 “LP를 들으면 소리가 가끔 튀고 먼지 자국도 있지만 편안함을 주는 것처럼, 화폭에 보이는 작은 균열도 자연스럽게 탄생한 아날로그적 흔적”이라고 했다. 2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