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데뷔곡 ‘판도라’를 발표해 유튜브 뮤직비디오 영상 조회 수 2700만회를 기록한 4인조 가상 걸그룹 ‘메이브’(위), 올해로 데뷔 3년 차를 맞은 6인조 가상 걸그룹 이세계 아이돌. 지난해 오프라인 공연 관객 1만여 명을 모아 화제가 됐다(아래 왼쪽), 지난해 3월 데뷔한 5인조 가상 보이 그룹 플레이브. 국내 가상 아이돌 최초로 앨범 초동 판매 20만장을 달성했다./메타버스엔터·패러블엔터·블래스트

#1. ‘41억9889만원’. 지난 25일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웹툰 ‘마법소녀 이세계아이돌(이세돌)’ 단행본과 굿즈 발매에 모인 금액이다. 올해로 데뷔 3년 차인 버추얼(가상) 걸그룹 이세돌의 멤버 6명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책 발매 소식에 3만여 팬이 몰렸다. 국내 단일 콘텐츠 크라우드 펀딩 역사상 최고액 후원 기록. 이들이 지난해 발매한 곡 ‘키딩’은 국내 음원 플랫폼 멜론 톱100 6위, 미국 빌보드 차트 K팝 부문 3위를 기록했다.

#2. 버추얼 보이그룹 ‘플레이브’는 지난달 캐럴송 ‘메리 플리스마스(Merry PLLIstmas)’ 발매 직후 음원 플랫폼 멜론 핫100 1위에 올랐다. 이들이 지난해 8월 발매한 첫 미니 음반은 가상 아이돌 최초로 초동(발매 첫 일주일간 판매량) 20만장을 넘겼다. 대형 음반 기획사 하이브 산하 보이그룹 ‘보이넥스트도어’가 직전 발매한 데뷔 싱글 음반 ‘후!’의 초동 숫자(11만442장)를 뛰어넘었다.

‘가상 아이돌’이 실제 아이돌 못지않은 성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음원 차트 순위’ ‘콘서트 관객 동원 수’ ‘굿즈 판매액’ 등 그간 K팝 그룹들의 성과를 가늠해왔던 전통적 지표에서 가상 아이돌 역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9월 인천 송도 달빛축제공원에서 이세돌이 간판 출연자로 무대에 오른 ‘이세계 페스티벌’ 공연은 티켓 총 1만장이 예매 시작 8분 만에 매진됐다. 이세돌의 소속사 패러블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이세돌이 한번 공연을 열거나 굿즈를 판매할 때 모이는 팬덤 숫자가 2만명 가량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그래픽=박상훈

◇최고 장점은 ‘자유로운 확장성’

가상 아이돌의 인기 요인으로는 먼저 ‘손쉬운 세계관 구축’이 꼽힌다. 최근 가상 아이돌은 크게 ‘사람의 외관’을 본떠 만든 ‘버추얼 휴먼’과 웹툰 속 주인공 같은 ‘만화 캐릭터’ 두 가지 형태로 활동한다. 2021년 국내 최초로 정식 데뷔한 가상 아이돌 걸그룹 ‘이터너티’는 사람의 본체에서 AI 기술로 수집한 정보를 조합해 만든 버추얼 휴먼의 이미지와 목소리로 활동한다. 이세돌, 플레이브 등은 실제 사람인 본체가 버추얼 장비를 착용해 만화 캐릭터의 이미지를 화면에 송출하는 방식이다.

국내의 한 대형 음반 기획사 관계자는 “어느 쪽이든 원하는 얼굴과 목소리를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다”며 “아이돌 소속사는 결국 뛰어난 외모와 노래 실력, 춤을 갖춘 연습생을 발굴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가상 아이돌은 일부분만 갖춰도 데뷔할 수 있고, 무엇보다 돌발 사고 이미지 관리를 쉽게 할 수 있다는 게 경쟁력”이라고 했다. 김도헌 대중음악 평론가는 “최근 현실 속 K팝 아이돌도 멤버들을 가상 주인공으로 바꿔 쓰는 웹툰, 웹소설이 활발하다. 가상 아이돌은 이런 콘텐츠에 이미 최적화된 형태”라고 평했다.

현실 아이돌이 할 수 있는 콘텐츠 대부분을 적은 비용으로도 똑같이 구현할 수 있게 된 기술 발전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패러블엔터테인먼트 측은 “멤버 한 명당 쓰는 버추얼 장비는 500만~600만원 수준이다. 가상 아이돌 영역에선 큰 자본 없이도 양질 콘텐츠 기획만 있다면 활동이 가능한 시대”라고 했다.

메이브, 플레이브 등 가상 아이돌은 사전 녹화를 통해 TV 음악 방송에 출연하거나, 기존 아이돌이 이용하던 일대일 팬덤 소통 채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이터너티는 지난해 9월 경기도 광명시 아이벡스 스튜디오에서 확장 현실(XR) 기술을 적용한 디스플레이를 활용해 국내 가상 아이돌 최초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전속 계약 맺는 가상 아이돌의 실제 모델

가상 아이돌에는 숨어있는 실제 인간 본체가 있다. 춤과 노래 훈련을 받은 연습생이 가상 아이돌의 숨어있는 인간 본체로서 소속사와 전속 계약을 맺는다. 가상 걸그룹 ‘메이브’를 선보인 메타버스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카카오엔터 소속 작곡가에게 곡을 받고, 전문 안무가가 짠 춤 동작과 우리와 계약을 맺은 인간 본체들이 전문 보컬 트레이닝을 받아 노래한 목소리를 멤버들의 이미지에 입력한다”며 “가상 아이돌이 성공하려면 얼마나 실체감을 줄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실제 K팝 아이돌 기획의 방식을 많이 참조하고 있다”고 했다.

패러블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최근 멤버들의 본체들과 정부에서 지정한 표준 계약서로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며 “가상 아이돌이 현실 아이돌만큼 인기가 올라왔지만 그에 비해 활동 기준은 상대적으로 명확하지 않아 경쟁 회사에서 멤버를 빼 가려는 ‘템퍼링’까지 시도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