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을 받고 사건을 조작하던 비리 검사, 출세를 위해 동료를 짓밟던 인물이 드라마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2017년과 2020년 인기를 끈 드라마 ‘비밀의 숲1·2′의 빌런(악한) 중 한 명인 서동재 검사(이준혁 분)가 최근 방송을 시작한 ‘좋거나 나쁜 동재’의 주인공으로 돌아왔다. ‘비밀의 숲’이 검찰 내부 비리 고발과 검경 수사권 조정 등 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인기를 끌었다면, 이번 작품은 서동재라는 악한이 지난날의 과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내용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이른바 ‘스핀오프’ 작품으로 ‘비밀의 숲’ 원작자인 이수연(53) 작가가 크리에이터로 참여하고 이달 초 부산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지난 14일 방송 1화 만에 전국 최고 시청률 5%를 기록하며, 케이블과 종편 포함 동시간대 1위로 산뜻하게 출발했다.

'좋거나 나쁜 동재'에서 '스폰 검사'라는 과거를 떨쳐버리려 애쓰는 서동재(이준혁분)와 그의 과거를 들춰내려는 건설사 대표 남완성(박성웅분)이 자동차 창문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는 모습. 이 드라마는 지난 10일 티빙에서 2회분이 먼저 공개됐고, tvN 월화 드라마로 편성돼 14일 첫 회를 시작했다. /티빙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 작가는 “잘해보려 고군분투하지만, 매 순간 과거에 발목 잡히는 한 개인의 이야기”라고 했다. 전작(前作)에서 주인공 황시목(조승우 분)을 괴롭혔던 서 검사는 이번에 ‘스폰 검사’라는 과거를 떨쳐버리려 애쓴다. 하지만 그의 과거를 들춰내려는 건설사 대표 남완성(박성웅 분)이 등장해 그와 대립한다. ‘비밀의 숲’의 무거운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전개될 전망. 이 작가는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것보다는, 과거에 발목 잡힌 동재가 좋은 사람은 못 되더라도 프레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그렸다”며 “밉상이면서도 정이 가는 그를 중심으로 약간의 코미디가 가미돼 가볍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동재 검사는 원래 선과 악의 명징한 대립 구도에 변주(變奏)를 주는 캐릭터로 구상됐다. 모델 뺨치는 장신에 재벌 2세 같은 외모와 달리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전액 장학금을 조건으로 지방대 법대에 들어가 검사가 된 인물. 이른바 명문대 출신들이 장악한 검찰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남성. 그런데 이 인물이 어느 순간 시선을 끌었다. 학연도 지연도 없이 조직 내에서 출세를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에 시청자들 사이에서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자리 잡게 된 것. 현실에 있을 법한 입체적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면서 ‘악역인 듯 악역 아닌 악역 같은 너’ ‘우리동재, 느그동재’ 같은 애칭까지 붙었다.

이 작가는 “원래는 서동재가 시즌2 7~8회쯤에서 죽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마음대로 죽이지 못했다. 인물 스스로 생명력을 얻은 것. “비중이 큰 인물을 죽이는 급전개를 통해 반전과 충격을 주려 했죠. 그런데 선악을 넘나들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캐릭터여서 그런지 잘 안 되더라고요. 차라리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군분투하다가 마지막에 살아나는 게 임팩트 있겠다 생각해 살려뒀어요.” 그렇게 살려둔(?) 서동재가 스핀오프를 통해 화려하게 주인공으로 부활한 셈이다.

이 작가는 ‘비밀의 숲’ 시리즈에 등장하는 검찰에 대한 생생한 묘사, 조직 생활을 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내부 갈등에 대한 서술 등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한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을 낳았다. 이른바 ‘직장을 다니면서 짧은 시간 내에 대박을 터뜨린 작가’로 알려진 것.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하하 저는 데뷔를 하고도 십수 년을 무명으로 지낸 ‘백수 작가’였어요. ‘회사를 다니면서 작가를 준비한 천재’는 절대 아닙니다.”

그는 1995년 대학 졸업 후 무역회사 해외영업팀에 들어가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했다. 그때 1999년 방송작가협회의 작가지망생 구인 공고가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 한 치의 고민 없이 퇴사 후 작가지망생으로 지원했고, 그로부터 당선작까지 8년, 데뷔작까지 10년이 걸렸다. 첫 당선작은 사극. 김춘추가 유부남인 걸 숨겼다가 들켜 일어난 해프닝 등 신라시대 화랑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음모를 다룬 ‘모준’이라는 미니시리즈였다. 2007년 KBS와 MBC 극본 공모에 모두 당선됐지만 끝내 방영되진 못했다. “극본에 당선돼도 방송을 안 해주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다른 시험처럼 ‘오답노트’도 없으니, 정답을 알 수도 없는 이 업계에서 18년 동안이나 헤맨 거죠.”

글을 잘 썼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버릇은 오래전부터 해왔다. “학창 시절 독후감 숙제에서 ‘그러니까, 그래서, 그러므로’ 같은 접속사로 칸 수 채우기 급급한 사람이었어요. 다만 항상 공상에 빠져 있길 좋아했죠. 그런 특성이 저를 작가로 이끈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수연(53)

1971년생 드라마 작가. 1995년 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5년간 직장 생활을 하다 퇴사 후 작가를 준비했다. 2017년 ‘비밀의 숲’으로 데뷔해 ‘라이프’(2018), ‘비밀의 숲 2′(2020), ‘그리드’(2022) ‘지배종(2024)’ 등으로 ‘스타 작가’ 반열에 올랐다. 백상예술대상 극본상, 아시아태평양 스타어워즈 작가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