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송 ‘슬픈 계절에 만나요’ ‘순이 생각’ ‘잊지는 말아야지’는 50대 이상 한국의 중년층이라면 지금도 기억하며 여전히 흥얼거리는 노래다. 호소력 있는 간단명료한 후렴구가 입에 착 달라붙어 듣는 이의 마음에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고단하고 무례한 세상을 견디는 주문(呪文)이 되기도 한다.
DJ이자 싱어송라이터 백영규(白英奎·72)는 인천 지역 명물로 통하는 가수다. 1978년 인천 출신 이춘근(李春根)과 혼성 듀오 ‘물레방아’로 데뷔해 50년 가까이 가수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경기도 양평이 고향이지만 경찰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인천 부평에 정착해 누가 뭐래도 ‘제물포 사람’이 되었다. ‘추억의 신포동’(노래 백영규),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백영규, 정민경), ‘송도로 가자’(다비드), ‘동구데이트’(고아라) 등 인천과 관련한 가요를 작곡해 다른 가수들이 부르기도 하고 직접 노래하기도 했다.
덕분에 ‘인천을 빛낸 올해의 인천인 대상’(2016년)을 수상한 일도 있다. 백영규가 음악을 통해 인천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공헌했음이 객관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인천인’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김여사에요’, 역주행 인기로 화들짝
1970~80년대 스타였던 포크싱어 양하영이 최근 부른 ‘꿈의 나라’는 백영규의 곡에 유정복 인천광역시장이 노랫말을 붙였다.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이 노래에는 인천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담겨 있다. 노랫말은 이렇다.
<수도국산 힘들고/ 배고픈 시절에도 꿈 키웠네./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자유공원 오르며/ 짝사랑도 품었네./ 푸르른 추억이여/ 청춘의 추억이여/ 세월지나 상전벽해/ 하늘도시 국제도시/ 바다 위에 누워서/ 까만 별빛 헤면서/ 세계로 간다./ 기차를 타고/ 목청을 높여 크게 크게/ 친구들아 외쳐보자./잘생기고 어여쁜 인천/ 알고 보면 멋있는 인천/ 섬마을이 백육십팔 개/ 역사 깊은 문화의 나라/ 꿈의 나라, 꿈의 나라>
수도국산(水道局山)은 인천 송현동과 송림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6·25전쟁을 겪으며 가파른 언덕을 따라 판잣집들이 모인 생존의 공동체였다. 이곳에 달동네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백영규는 지난 2021년 정규 14집을 14년 만에 발표하더니 2년 전 신인가수 고아라에게 준 트로트 ‘김여사에요’가 대박을 쳤다. ‘김여사’의 운전 실력을 풍자한 곡인데 전현직 대통령과 야당 대표 부인이 ‘김씨’라는 상상력이 보태지면서 역주행 열풍을 일으켰다. 이 곡은 요즘 온라인 플랫폼 쇼츠 영상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안녕하세요. 김여사에요./ 말로는 들어보았죠?/ 그래 맞아요./ 내가 바로 유명한 김여사에요./ 운전 좀 못한다고/ 이 남자 저 남자/ 눈총 받고 오늘도/ 김여사는 운전 중/ 씩씩하게 씩씩하게 운전 중.>
이전에 만든 노래가 우연히 정치권과 엮이면서 백영규는 쏠쏠한 음원 수익 덕에 요즘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즐겁다. 내친김에 제2의 전성기를 꿈꿀 기세다.
음악 몰입하려 방송DJ 하차
작곡, 음반 제작, 공연기획은 물론 소극장과 야외무대에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6년째 하던 지역방송 DJ도 하차하기로 결심했다. 물이 들어오면 배를 띄워야 하니까. 그와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정규 14집 앨범(2021년)을 집중적으로 들어보았다. 발라드와 록, 트로트 등 장르를 넘나드는 곡들로 채워져 있었다. 어떻게 한 사람 안에 이렇게 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이 펼쳐져 있는지 음악적 내공이 무척 궁금해졌다.
그를 만나기 위해 인천 영종도로 향했다. 하늘 위에 떠다니는 구름 사이로 음표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아래로 손차양을 하면 수도국산이 보일 것만 같았다.
- 인천이란 가수 백영규에게 어떤 곳인가요.
“아버지의 전근으로 5학년 2학기 때 부평서국민학교로 전학, 줄곧 인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지요. 제가 살던 부평에 중·고교가 없어 인천을 오가며 통학했고 대학(한국외대 이태리어과) 시절에도 경인선(京仁線)을 누비며 인천 친구들과 깊이 사귀었죠.
부평은 인천의 원도심(原都心)과 마주한 독립도시로서의 인식도 있어요. 부평구 출신들은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면 ‘인천’이 아닌 ‘부평 사람’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러니 인천에 대한 정(情)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어요.”
인천은 포크음악의 도시다. 인천을 빛낸 가수로 박상규(인천고), 송창식(인천중), 여성 듀엣 산이슬(박경애·주정이-인천여상), 남성 듀엣 유심초(유시형·유의형-동산중고), 물레방아(이춘근·백영규-인일여고·동산중고), 이영식(제물포고), 솔개트리오(황영익·김광석·한정선) 등이 인천에 똬리를 튼 포크뮤지션이다.
“인천이 음악도시, 그중에서도 포크도시가 된 것은 개항지(開港地)로서 팝 문화를 직수입한 지리적 환경을 무시할 수 없어요. 부평에 주둔하던 미군(美軍) 부대의 음악적 환경, 문화 용광로였던 수도권과 서울의 직간접 영향도 컸다고 봅니다.”
인천과 이춘근, 그리고 물레방아
인천의 명문 동산중고를 나온 그는 서울로 통학하다가 숙명여대 체육과 학생인 이춘근을 알게 됐다. 당시 이춘근은 ‘디스코 퀸’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물레방아’가 결성됐다. 이춘근의 리듬감 넘치는 보컬과 백영규의 우울과 고독이 깃든 차분한 목소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메우며 색다른 듀오의 모습을 내보였다.
1978년 아세아레코드를 통해 발매된 물레방아의 데뷔 앨범에 실린 ‘순이 생각’이 빅 히트를 쳤다. 이 곡은 백영규가 30경비단에서 군 복무 중이던 시절 만들었단다.
<시냇물 흘러 흘러 내 곁을 스치네./ 물가에 마주 앉아 사랑을 그리며/ 속삭였네, 우리 꿈을./내일이면 만날 그날이 돌아오건만/ 얼마나 변했을까나 우리 순이야./ 설레임에 내 마음은 벌써/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네, 순이 생각에.>
그는 “대학 시절 기타 치며 노래하다 보면 머릿속에 스쳐가는 게 ‘가수나 한 번 해볼까’였다”고 했다. ‘순이 생각’이 라디오 전파를 타면서 첫 앨범은 10만 장이 넘게 팔렸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듬해 신세계레코드로 소속사를 옮기고 발표한 2집 타이틀곡 ‘잊지는 말아야지’ 역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앨범은 금세 15만 장 이상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땐 언더그라운드 개념이 없었어요. 업소에서 통기타 치던 시절도 아니었죠. 하루는 레코드사 상무가 저를 데리고 은행에 가더니 돈다발을 담는 겁니다. 방송국 피디에게 준다고 말이죠. 자기가 애쓰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2집을 끝으로 물레방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이춘근씨는 명품 보이스였죠. 세월이 흘러 둘이서 기념 음반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는데 제가 반대했어요. . 첫사랑은 간직하는 것이다란 말이 있잖아요. 이기적이지만 그때 목소리를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싶었어요. 세월이 흘러 다시 녹음하면 분명 마찰이 생길 겁니다. 목은 무뎌졌고 듣는 귀는 더 발달했으니까요.”
배우 장미희와 만든 영화 <슬픈 계절에 만나요>
백영규는 1979년 솔로 앨범을 내며 홀로 섰고 이듬해 히트레코드사에서 나온 2집 앨범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1980년 MBC 남자 신인가수상을 안겨준 노래는 ‘슬픈 계절에 만나요’. 당시 여자신인상은 계은숙이었다. “솔로 1집에 실린 ‘가신 님 그리워’라는 곡이 준(準)히트 정도는 됐어요. 아쉽게도 좀 알려지려고 하는데….” 1979년 10·26 사태가 터져 더는 ‘가신 님 그리워’를 라디오에서 들을 수 없게 됐다고 한다.
- 박정희 대통령 시해(弑害)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곡인데….
“금지곡이 아닌데도 방송국에서 안 틀더라고요.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나온 곡이 ‘슬픈 계절에 만나요’였죠.”
이 곡은 왠지 광주 5·18 항쟁 같은 사회적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인생이란 게 살면서 겪을 건 다 겪기 마련이잖아요? 광주에서 그런 비극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곡이 나오자마자 크게 알려지게 됐죠.”
애수(哀愁) 띤 가사와 멜로디 그리고 백영규 특유의 쓸쓸한 음색이 조화를 이룬 ‘슬픈 계절에…’는 라디오 방송과 전국 음악 감상실, 음악다방에서 경쟁하듯 흘러나왔다. 시대적 비극이 변주(變奏)되는 느낌이었을까. 그 무렵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슬픈 계절에…’와 함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땐 히트한 노래를 바탕으로 극(劇)영화를 만들던 흐름이 있었어요.
‘창밖의 여자’도 영화화됐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제목으로 못 쓰게 돼 <그 사랑 한(恨)이 되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만들어졌죠. 감독은 이형표, 주연은 조용필·유지인이었어요.”
반면 박남수 감독의 영화 <슬픈 계절에 만나요>는 백영규·장미희가 출연했다. 영화는 가수지망생(백영규)과 그를 뒷바라지하는 여인(장미희)과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 ‘슬픈 계절’은 어떤 계절을 말하나요.
“’슬픈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닌 제5의 계절이죠. 이별했기에 현실에선 만날 수 없으니까 죽어서라도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노래입니다.”
앨범 발매 이후 백영규는 하루 평균 160여 통의 팬레터를 받았다고 한다. 앨범 역시 120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어쩌면 이 곡은 백영규를 기억하는 이에게 ‘심장’과 같은 곡이다. 이후 자신의 음악적 노선(路線)과 정체성을 찾게 해준 곡이라고 할까. ‘슬픈 계절에 만나요’ 1절은 이렇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가슴 깊이 파고드는데/ 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에 스쳐가는 바람소리뿐./ 바람결에 보일 것 같아 그의 모습 기다렸지만/ 남기고 간 뒹구는 낙엽에 난 그만 울어버렸네./ 사랑인 줄은 알았지만 헤어질 줄 몰랐어요/ 나 이렇게도 슬픈 노래를 간직할 줄 몰랐어요./ 내 마음의 고향을 따라 병든 가슴 지워버리고 슬픈 계절에 우리 만나요, 해맑은 모습으로.>
- 영화는 흥행이 됐나요.
“부모님을 모시고 극장엘 갔는데 관객들이 줄지어 장사진을 이뤘더군요. 대구 한일극장에서 무대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닷새 동안 대구에 머물렀는데 정말이지 난리가 났어요. 팬들 성화에 밥 먹으러도 못 갈 정도였으니까요. 그때 만났던 여학생 팬을 지금도 만납니다.”
- 그 후 연기에 대한 욕심은 없었나요.
“지나가는 말로 ‘가요계에서 나와 영화 좀 찍지’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솔깃했지만 몸이 완강히 거부하더군요. 정식 제안이라기보다 영화판에서 좀 놀자는 분위기랄까. 일단 술값을 제가 다 내는 게 싫었고 그런 분위기가 싫었어요. 제가 돈이 많은 줄 알았나 보죠?”
- 그러고 보니 무명 시절이 없었네요.
“무명 시절이 있었다면 고생을 통해 마음을 다졌을 텐데 그게 없으니 웬만한 시련을 못 이기는 거예요. 음반만 내면 히트가 되는 걸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 자신의 성격은 어떻다 생각하나요? 뭔가 고집스럽고 한길로만 가는 스타일 아닌가요.
“아뇨. 타협은 하는데 완성도를 위해 집중력이라든지… 사실 옆에 있는 사람이 감당을 못 하죠.”
- 곡을 만들기 위해 며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나요.
“밤을 새우든 뭘 하든 원하는 곡이 나올 때까지 무한 반복하죠. 마음에 안 들면 다 지은 집[곡이나 멜로디]을 그냥 부숴버려요.”
이 대목에서 마음에 안 드는 도자기를 가차 없이 깨버리는 도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 그것 쉽지 않잖아요.
“완전히… 다 부숴버려요. 근데 대개 사람들은 아까워 못 버리거든요. 저는 다 버려요. 모조리. 그런데 전체적인 숲을 봐야 해요. 나뭇가지만 봐선 안 되고 현재 흘러가는 트렌드까지 봐야 합니다.”
이런 완벽에 대한 그의 집념이 각각 개성을 뿜어대는 다양한 곡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현재 저작권협회에 등재된 곡은 얼마나 되나요.
“한 240~250곡 됩니다. ‘순이 생각’ ‘잊지는 말아야지’ ‘슬픈 계절에 만나요’ ‘성아의 이야기’ ‘얼룩진 상처’ ‘떠나고 싶어라’ ‘계절이 두 번 바뀌면(방미)’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박정수)’ ‘나는 홀로 있어도(유심초)’ 등이 널리 알려졌어요.”
인천은 해마다 포크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작년에는 5월 25일과 26일 양일간 인천아트플랫폼 중앙광장에서 열렸다. ‘백영규와 백다방 밴드’가 나와 관중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 인천이 포크음악 도시로 위상을 다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대중문화 인재들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창작 시스템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시민의 공감을 받아 대중 매체에 흔들리지 않는 인천만의 문화를 형성하면 좋지요.
또 장르별로 특화된 공연, 완성도가 높은 유료 공연이 활성화되면 금상첨화(錦上添花)죠. 물론 직접 무대에 설 수 있는 작은 극장도 필요합니다.”
- 나이 일흔의 의미는?
“사람을 알고 이해하려는 끈기와 인내심이 좀 늘어난 것 같아요. 자유분방함 속에서 절제를 배워가는 중입니다.”
-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작품으로 삶의 흔적을 더 남기고 아내와 많은 시간을 즐기고 싶습니다. 친구들과 술 한 잔을 나누고 수다도 떨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