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상징처럼 여기던 흰옷과 상투는 언제 사라졌을까. 상투는 기원전 1세기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와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할 만큼 유구한 내력을 가졌다. ‘사기’ 조선열전엔 연나라 사람 위만이 1000여명과 함께 상투를 틀고(魋結) 고조선으로 넘어왔다고 소개한다. 씨름하는 사람이 그려진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에도 상투 튼 이들이 등장한다.
흰 옷(白衣)의 내력도 만만찮다. 기원후 3세기 기록인 진수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魏誌 東夷傳)에는 부여 풍속을 전하면서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는다’고 썼다.
역사에 해박한 육당 최남선은 ‘조선 민족이 백의를 숭상함은 아득한 옛날로부터 그러한 것으로서…수천년 전의 부여 사람과 그뒤 신라와 고려와 조선의 모든 왕대에서 한결같이 흰 옷을 입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조선 민족은 옛날에 태양을 하느님으로 알고 자기네들은 이 하느님의 자손이라고 믿었는데 태양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로 흰 빛을 신성하게 알아서 흰 옷을 자랑삼아 입다가 나중에는 온 민족의 풍속을 이루고 만 것’(‘조선상식문답’ 47쪽)이었다.
2000년 내력을 지닌 흰 옷과 상투가 20세기 들어 사라진 것은 근대의 힘일 것이다. 1895년 단발령 이후 상투가 일거에 없어진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진 않다. 1920년대 기독교와 천도교, 신간회, 조선일보 등 계몽적 지식인들이 온 힘을 쏟아부어 캠페인을 펼친 것은 전국 곳곳에 상투와 흰옷 입은 주민들이 여전히 다수였기 덕분이다. 1929년 조선일보가 펼친 생활개신운동은 고래의 상투와 흰 옷을 없애는 데 기폭제가 됐다.
◇‘조선 사람아! 새로 살자’
‘모든 식자, 선구자, 그리고 만천하 조선인 민중이여! 오인은 지금 생활개신의 몇가지 과목을 걸고 당신들의 앞에 서서 그러나 당신들의 합작을 기다려서 가장 진지견실한 노력을 계속하려 합니다. 그 과목은 별것이 아니니 색의단발 건강증진 상식보급 소비절약 및 허례폐지의 다섯 가지 운동을 일으키려 함입니다.’
1929년 4월14일자 조선일보 1면엔 2단짜리 사설 ‘생활개신을 선양함-본사 주최의 신운동’이 실렸다. 일상의 변화, 생활의 혁신을 위해 5대 과제를 내걸었는데, 첫번째가 흰 옷을 입지말고, 상투를 자르자는 ‘색의단발’(色衣短髮) 이었다.
‘내구성이 있고 동작에 편리하며 외관에 서툴은 바 없으라고 그리하여 경제상 시간상 큰 손실을 방지하고 민중적 생활의 능률을 증진케 하기 위하여 백의를 폐지하고 색의(色衣)를 입자고 주장합니다. 쇄국하던 시대 고루한 장신법(裝身法)의 가장 보기 싫은 유물인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졸라매어 생생한 기식(氣息)의 발동을 시들게 하는 망건을 폐지하자고 고조(高調)합니다.’
◇비행기, 인력거까지 선전 행렬
한달전 사고(社告)를 통해 생활개신운동의 기치를 올린 신문은 5월16일을 D데이로 삼아 전국적으로 거리 캠페인을 벌였다. ‘조선 사람아! 새로 살자’를 구호로 내걸었다. 경성 수송동 조선불교 교무원 앞에서 열린 행사에선 안재홍 조선일보 부사장 겸 주필이 취지를 연설한 후, 신용욱 조선비행학교 교장의 축하 비행이 펼쳐졌다. 수천명의 소년소녀가 만세를 부른 뒤 손에 깃발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50여대의 자전거 부대가 뒤를 따랐고, 자동차와 인력거도 선전 깃발을 달고 달렸다니 볼 만한 풍경이었을 것이다.(개신의 활기 띤 경성천지, 조선일보 1929년 5월18일)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선 안재홍 윤치호 이종린 신흥우 송진우 민태원 조병옥 등 유명 인사과 언론인이 나서 강연회를 열었다. 평양에선 조만식 이관구가 연설했다. 전국의 신간회 지회와 기독 청년회, 체육회, 여자청년회, 소년회 등이 참여하면서 운동은 확산됐다. 전국 각지에서 열린 강연회에선 연사들이 색깔있는 옷을 입고, 상투를 자르자고 호소했다.(서동일, ‘상투는 언제 사라졌나?’ 89쪽) 단발은 일파만파로 번져갔다.
◇신간회 주요사업으로 단발 추진
백의단발 캠페인을 주도한 단체 중 하나는 신간회였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 세력을 아우르는 민족단일전선으로 1927년 2월 창립됐다. 신간회는 창립 당시 주요 과제중 하나로 단발을 내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신간회의 ‘사실상 기관지’ 역할을 한 조선일보는 1928년 3월28일자 사설 ‘실제운동의 당면문제 2′에서 신간회 당면과제 중 여섯번째로 ‘심의(深衣 , 색깔있는 옷)단발의 이행으로 백의와 망건의 폐지를 고조한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상투와 흰옷은 ‘유식(遊食)의 표상, 쇠퇴의 기호인 망국의 망령’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신간회 회원과 각 사회단체 회원들부터 상투를 자르고 흰 옷을 거부하자는 운동을 펼쳤다. 1929년 신간회와 각 사회단체, 조선일보가 펼친 단발 캠페인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인권유린 비판 받은 총독부의 강제단발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1930년대 총독부가 무리수를 쓰며 단발을 강행한 것이다. 지난 주 연재([모던 경성]제2의 단발령? 面 직원들이 마구잡이로 상투잘라)한 것처럼, 총독부는 1932년 소위 ‘농촌진흥운동’을 펼치면서 ‘민풍(民風)개선’을 추진했다. 총독까지 나서 단발 강화와 색의(色衣, 색깔있는 옷) 착용을 독려하면서 곳곳에서 야만적 인권유린 행위가 벌어졌다. 면 직원들이 칼, 가위를 들고 강제로 주민들의 상투를 자르고 닥치는 대로 흰 옷에 검정칠을 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이런 곡절을 거치면서 도시는 물론 시골까지 상투 튼 사람은 노인을 제외하곤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한민족을 상징하던 흰 옷과 상투는 우여곡절을 거치며 이렇게 사라졌다.
◇참고자료
서동일, 상투는 언제 사라졌나?,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06집, 2023 가을호
설주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사회교화사업연구, 전주대 사학과 박사논문, 2019
김은주, 농촌진흥운동기 조선총독부의 생활개선사업과 ‘국민’동원,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 논문, 2011
하원호, 흰 옷과 상투, 내일을 여는 역사, 2001 겨울
최남선, 조선상식문답, 동명사, 1946
조선일보 100년사 편찬실, 조선일보 100년사, 조선일보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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