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술 먹고 남의 집에서 자다 온 후줄근한 설정이에요.” 14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시인 고선경(28)은 체크무늬 셔츠에 판다 스티커를 붙인 헤드폰을 목에 걸고 나타났다. “저는 왜 남의 집에서 시가 잘 써질까요? 제 집에선 절대 못 쓰거든요.” 얘길 듣다 보니 설정이 아니었다.
요즘 ‘문단의 아이돌’이다.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이듬해 10월 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를 펴냈다. 지금까지 16쇄(3만부)를 찍었다. 규모가 작은 시집 시장에선 짧은 기간에 달성한 이례적인 판매 부수다. 문학동네·난다·창비 등 그와 계약한 출판사들이 줄을 서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그 덕에 ‘전업 시인’으로 활동 중이다. 등단 3년 차 시인이 시인선의 문을 여는 이변도 벌어졌다. 출판사 열림원은 새 시인선을 시작하며 첫 주자로 고선경을 택했다. 그 결과물이 지난달 나온 두 번째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알’.
그에겐 ‘MZ 시인’이라는 수식이 붙는다. ‘투룸 신축 빌라 보증금 이천에 월세 구십’(‘샤워젤과 소다수’), ‘한달 월세 칠만엔/ 쉐어하우스’(‘키치죠지에 사는 죠지’)처럼 청년 세대의 구체적 삶을 녹인다. ‘아르바이트를 잘리고 가게를 나서기 전/ 얼음물 좀 마셔도 되겠습니까 물었다 (중략) 그런데 왜 어떤 가게들은 집이라고 불리는 걸까? 술집 꽃집 찻집/ 가엾은 사장님 중국집에 갇혔네’(‘알프스 산맥에 중국집 차리기’). 기형도의 ‘빈집’을 패러디해 사장님을 가게에 가두는 발칙함도 지녔다.
등단 때부터 남다른 ‘시적 패기’(심사위원 이문재·정끝별 시인의 평)가 돋보였다. 가장 화제가 된 시는 첫 시집에 실린 ‘스트릿 문학 파이터’. ‘세계 최초 시 서바이벌 오디션이 시작됐습니다./ 지금 바로 투표해주세요’ 상상은 뻗어 나간다. ‘“자 이번엔 금지어 미션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린 단어는 시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계, 미래, 사랑, 기계, 영원, 천사. 바다, 숲, 여름, 겨울, 비, 눈, 유령, 죽음!”// 습작생들은 탄식했다 심하게 좌절한 습작생의 경우 상담 치료를 신청하기도 했다…”
두 번째 시집에선 밈(meme)과 패러디를 덜어냈다. 그는 “‘밈이나 패러디 없이 시를 못 쓰나?’ 하는 말에 욱한 것도 있다”며 “첫 시집의 청량함, 귀여운 오브제를 동원한 키치함보다 좀 더 깊이감 있는 시집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죽음이나 상실처럼 묵직한 소재를 일부러 택했다. “그런데 아마 그렇게 깊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 너무 젊고, 경험이나 공부가 부족한 걸 수도 있고….”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홀로그래피’)는 시인은 “삶에 대한 기대와 애착”이 크다. 더 잘하고픈 욕심도 많다. 최근엔 시 수업을 신청했다. 과제로 ‘내 남자친구는 재벌 3세’라는 시를 썼다. “동료 시인에게 보여줬는데 ‘선경씨의 패턴이 이제 너무 잘 읽힌다’는 거예요. 저도 절실히 느끼던 문제거든요.” 시인은 “잘하는 것을 계속하는 것”과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탄력 있는 스프링처럼 튀어오를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좋겠어요.”
이번 시집엔 ‘스트릿 문학 파이터’의 후속이라 할 만한 시도 실렸다. 홈쇼핑에 시를 팔러 나온 시인들이 등장한다. ‘방송을 본 선생님들 “시집은 잘 팔리는 게 다가 아니야” 쓴소리에 고개를 떨군다 해도 (중략) “떨군 고개를 원래 스트레칭하려 했던 것처럼 한바퀴 돌리는 것까지가 제 시집의 장기입니다” 선생님들께 말씀 올리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도전! 판매왕’). 고선경은 귀여운 능청스러움을 동력 삼아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