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배우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황정민이 다 나온 영화가 있다. 지난 26년간 쉽게 볼 수 없었던 그 영화, 한국 블록버스터의 시초 ‘쉬리’(1999)가 돌아온다. ‘쉬리’는 판권을 갖고 있던 삼성영상사업단이 IMF 이후 해체되면서 어디에도 풀리지 못했다. 다행히 최근 CJ ENM이 배급을 맡아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19일 재개봉한다.
‘쉬리’를 쓰고 연출한 강제규(63) 감독은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쉬리’는 저 개인의 성장 과정과 한국 영화의 발전 궤적이 절묘하게 일치해 탄생한 작품”이라며 “제가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쉬리’는 한국 영화사를 그 전과 그 후로 나눈다. 한때 ‘방화(邦畫)’로만 불리던 한국 영화가 볼거리와 서사의 규모에서 미국 영화를 따라갈 수 없다는 할리우드 콤플렉스를 극복한 발판이었다. 국내 개봉 이듬해인 2000년 1월 일본에서도 전국 동시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제작 전반에서 최초였고 최고였다. 제작비 31억원으로 한국 영화 사상 최고액이었으며, 70인조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도 한국 영화로는 기록적인 규모였다.
영화를 넘어 사회 현상이기도 했다. “용공 영화다” “아니다, 반공 영화다”라며 논쟁이 벌어지고, 여야에서 상반된 논평을 내놨다. 국방부가 ‘쉬리’를 군 정신교육용으로 상영하려 하자, 북한의 대남 선전 매체에서 “반북 모략 영화”라고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공식 집계 관객은 582만명, 배급사 추산으론 620만명이었다. 할리우드 영화 ‘타이타닉’의 관객이 226만명이던 시절에 그 두 배 이상이 몰려든 초대형 성공작이었다.
강 감독은 “’쉬리’ 성공의 숨은 일등 공신은 정도안 데몰리션 대표”라며 “정 대표가 ‘쉬리’에서 처음 개발한 여러 특수효과 덕분에 할리우드 못지 않은 액션이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정도안(67) 대표는 ‘한국 특수효과의 대부’로 불린다. 1976년 영화 ‘사대독자’로 시작한 그의 경력은 50년을 바라본다. 최근작으론 ‘범죄도시4’ ‘하얼빈’ ‘밀수’, 디즈니플러스의 ‘무빙’이 있다. 임권택,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최동훈, 류승완, 김성수, 허진호,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 함께 일해보지 않은 감독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영화인이 그를 찾았다. 최근 들어 특수효과에 CG를 쓰는 경우가 늘고 있으나 정 대표의 손맛으로 만들어내는 생생함은 CG가 범접하지 못하는 사실성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특수효과의 전환점이 된 ‘쉬리’의 도심 총격전은 획기적인 진보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총탄이 터지고 불꽃이 이는 효과를 대규모로 내지 못했다. 정 대표는 석 달간 200여 차례 실험과 실패를 되풀이해가며 ‘쉬리’에서 불꽃과 파편이 튀는 장면의 현장감을 만들어냈다. 화약을 대량으로 구하기 어려워 비슷한 분말을 만들어내느라 날밤을 샜다. 손등이 화상으로 늘 벌겠다. 파편이 튀는 효과도 구현이 만만치 않았다. 총탄이 벽에 박힐 때 한꺼번에 최대한 격렬하게 튀면서도 배우들이 맞아도 아프지 않아야 했다. 도입 가능한 모든 재료로 실험을 해본 결과, 결론은 나무껍질. 적당한 골판지를 구해 특수 처리해 썼다.
강 감독의 감사 인사를 전해 들은 정 대표는 “제가 아니라 강 감독이 대단한 분”이라며 다시 강 감독에게 공(功)을 돌렸다. 정 대표는 본지 통화에서 “강 감독은 저는 물론 한국 영화 엔지니어들의 은인”이라며 “강 감독이 ’쉬리’를 만들었기에 꿈꾸던 기술에 도전해볼 기회가 주어졌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쉬리’ 이후 ‘태극기 휘날리며’(2004) ‘마이웨이’(2011) ‘장수상회’(2015) ‘1947 보스톤’(2023)까지 강 감독이 연출한 모든 작품을 함께했다. 정 대표는 강 감독의 한마디에 감동했던 일화도 전했다. “현장에서 묵묵하게 일만 하는 강 감독이 어느 날이던가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전화를 했어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라는 한마디였을 뿐인데 모든 고생이 싹 없어지는 것 같았죠.”
‘쉬리’는 지난해 일본에서 재개봉했다. 강 감독은 “현지 사인회장에서 일흔쯤 돼 보이는 관객분이 내민 사인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24년 전 상영 때 받아간 사인지를 간직했다가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두 번째 사인을 받은 관객은 “다시 보니 반갑다”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강 감독은 차기작도 구상 중이다. 그는 “이제껏 걸어왔던 저의 좌표를 돌아보고, 제가 잘하던 점을 성숙시켜 거기에 맞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며 “제가 한국 영화에 아직까지 쓰임이 있다면 확실하게 쓰임새의 역할을 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히드라를 아십니까?”
강제규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쉬리’ 속 대사 한마디"
강제규 감독은 ‘쉬리’ 시나리오를 쓸 때 한 대사를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남북 대치라는 비극적 상황, 그 안에서 살아가다 어쩔 수 없이 괴물이 돼버린 존재의 처연함을 응축할 한마디였다.고심 끝에 완성된 대사는 마지막 부분에서 특수 요원 유중원(한석규)을 통해 전달된다. “혹시 히드라를 아십니까. 몸은 하나인데 전혀 다른 인격을 갖고 있어요. 이 시대가 낳은 히드라. 분단 현실이 그녀를 히드라로 만들었어요.” 그의 연인 이명현이면서 동시에 그가 추적해 온 북한 공작원인 이방희(김윤진)를 비유한 말이었다. 강 감독은 “여러 자아로 살아가야 하는 모순을 담으려고 애쓴 대사라 유독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