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신(神)하고 둔다고 해도 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1989년 9월 ‘바둑 올림픽’ 잉창치배(應昌期杯)에서 중국의 녜웨이핑(聶衛平)을 꺾고 우승한 조훈현은 기세등등했다. 패배를 모르는 ‘바둑의 전신(戰神)’으로 불렸다. 9세에 최연소 프로 데뷔한 그는 30대 중반에 절정의 기백이 넘쳤다. 10대 제자 이창호를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 조훈현이 한지붕 아래 재워주며 먹이고 입혀가며 가르친 내제자(內弟子) 이창호는 불과 15세에 스승이 가진 타이틀을 차례로 빼앗고 계산의 귀재라는 ‘바둑의 산신(算神)’으로 떠올랐다. 창졸간에 무관으로 전락한 조훈현은 그대로 무너진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다.
◇스승과 제자의 소리 없는 혈투, 천신만고 개봉
영화 ‘승부’(26일 개봉, 감독 김형주)는 19줄 반상을 매캐한 화약 연기가 뒤덮인 전장으로 그린다. 마주 앉은 두 기사는 스물두 살 차이 나는 스승과 제자. 스승이 앞서가면 제자가 따라붙고, 제자가 집을 지으면 스승이 뛰어들어 부숴버린다. 스승 조훈현(이병헌)은 빠르고 화려했다. 기세와 공격의 바둑이었다. 제자 이창호(유아인)는 두텁고 묵직했다. 인내와 수비의 바둑이었다. “어서 물고 뜯고 덤비고 싸우라”고 말하는 스승에게 “그건 선생님 스타일”이라고 제자는 맞선다. 조훈현은 훗날 자서전(2015)에서 “창호는 떠오르는 태양이었다”며 “그 이글거리는 뜨거운 열기에 밀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조훈현은 어린 제자를 통해 자신을 돌아본다. “나도 배운다, 내가 언제든지 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그는 그렇게 제자라는 거울을 보며 다시 태어났다.
‘승부’는 개봉부터가 쉽지 않은 승부였다. 2021년 4월 촬영을 마쳤으나 코로나를 만났다. 2023년 넷플릭스 공개 예정이었으나 유아인의 마약 논란이 불거졌다. 원래 투자 배급사가 영화 사업을 접으며 언제 빛을 볼 지 알 수 없는 위기로 몰렸다. 작년 겨울 곽도원 음주 논란의 영화 ‘소방관’을 소생시킨 투자배급사 바이포엠스튜디오가 나서면서 간신히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게 됐다.
◇이병헌의 영화, 조연 조우진도 돋보여
유아인 논란이 없었더라도 ‘승부’는 이병헌의 영화다. 이병헌은 10대 제자에게 모든 타이틀을 빼앗긴 쓰라림을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핑그르 차오르는 눈물에 담는다. 이기지 못하는 초조함, 결국 져버린 초라함, 지울 수 없는 열패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유아인은 과묵한 이창호 역으로 주변 공기까지 누그러뜨린다. 스승을 이긴 날, 벅차야 할 승리의 순간에 “죄송하다”며 터뜨린 울음에선 아직 여린 10대 소년이 내비친다. 이병헌의 라이벌이자 조언자인 남기철 9단 역의 조우진은 짧은 분량에도 조연 이상을 보여준다. 영화 ‘내부자들’(2015)에서 “여 하나 썰고, 여 썰어”라는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이병헌(안상구 사장)의 손목에 쇳톱을 갖다댔던 조우진은 ‘승부’에선 이병헌을 일으켜 세운다. “배우려고 하지 말고 이길 궁리를 해보라”며 이창호를 자극하고, “선생보다 제자가 낫다”며 이창호의 능력을 먼저 알아본 것도 그였다.
연출과 각본에선 바둑을 전혀 모르는 관객까지 끌어안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조훈현이 다리를 떨면 그 판은 무조건 잡는다’ 등의 긴장 포인트를 곳곳에 심었다. 수수한 중년 같지만 일상복에 관심이 많았다는 조훈현의 취향을 반영해 50여 벌을 갈아입힌 조상경 의상감독의 세심함도 완성도를 높였다. 어린 이창호(김강훈)가 지나치게 밝고 활발하게 연출된 점은 아쉽다. 실제 이창호는 어릴 때도 사흘에 한마디 듣기 힘들 정도로 과묵했다. 어린 이창호의 명랑함은 성인 이창호의 말없이 단단한 연기와 대조돼 인물의 균형을 깨뜨린다.
“또 너냐. 도리 없지. 이것이 승부니까.” 다시 반상에서 제자를 적수로 마주한 조훈현의 담담한 인정은 또 한 번의 패배라도 감내하고 이겨나가겠다는 선언이다. 조훈현은 이후에도 제자와 대적했고 때로 패했지만 재차 도전했다. “적어도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는 않음으로써 나 자신을 증명해보였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고 했다. 결과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과정까지 승부의 일부이기에. 영화 초반 조훈현은 “일류가 아닌 인생은 너무 서글프다”고 했다. 그럼에도 다시 대국에 나선다. 도리 없다. 그것이 인생이니까.
☞조훈현·이창호
조훈현=1953년 전남 목포 출생. 9세에 최연소 프로 바둑 기사로 입단했다. 한국기원 소속 프로 기사 최초의 9단이다. 세계 최초로 바둑 국제 기전 그랜드슬램을 이뤘다. 20대 국회의원(새누리당, 비례)을 지냈다.
이창호=1975년 전북 전주 출생. 11세에 프로 입문하여 14세에 최연소 국내 타이틀, 17세에 최연소 세계 타이틀을 획득했다. 메이저 세계 대회 우승 횟수 17회로 역대 1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