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수완이 부족한 스타트업 대표 창욱(하정우·오른쪽)은 4조원짜리 국책 사업을 따내기 위해 인생 첫 골프 로비에 나선다. 부패한 기자(이동휘·왼쪽)가 인맥을 동원해 국토부 최실장(김의성)과의 골프 라운딩을 성사시키고 진흙탕 로비가 펼쳐진다. /쇼박스

2018년까지 주연을 맡은 영화로 누적 관객 1억명을 모은 배우 하정우는 코로나 이후 깊은 부진에 빠졌다. 2020년 개봉한 ‘클로젯’(127만명)부터 ‘비공식작전’(105만)·‘1947 보스톤’(102만)·‘하이재킹’(177만)·‘브로큰’(19만)까지 전부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 비슷한 장르, 비슷한 캐릭터에 식상함을 느끼는 관객도 늘었다. 5연속 흥행 실패로 슬럼프에 빠진 배우 하정우가 이번엔 감독 하정우로 역전을 노린다.

하정우가 감독 겸 주연을 맡은 ‘로비’는 색깔이 뚜렷한 영화로 호불호는 갈릴 수 있지만, 적어도 식상하진 않다. 연구밖에 모르던 스타트업 대표 창욱(하정우)이 4조원짜리 국책 사업을 따내려 접대 골프에 뛰어드는 이야기. 경쟁사 대표인 광우(박병은)가 국토부 장관(강말금)을 먼저 포섭하자, 창욱은 실무자인 최 실장(김의성)을 공략하며 로비 경쟁을 펼친다. “더럽게 싸움을 걸면, 같이 더럽게 싸워줘야죠”라는 대사처럼, 고급 골프장에서 벌어지는 온갖 상스럽고 지저분한 일들을 코믹하게 그렸다. 하정우는 “골프장이 굉장히 광활하면서도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은밀한 공간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블랙 코미디에 적합한 공간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영화 '로비' /쇼박스

‘롤러코스터’(2013), ‘허삼관’(2015)에 이어 세 번째 연출작이다. 감독 데뷔작이었던 ‘롤러코스터’는 쉴 틈 없는 말장난과 맥락 없는 ‘병맛’ 개그로 명작과 망작이라는 평을 동시에 들었다. 12년 만에 나온 ‘로비’는 깔끔하게 정돈된 ‘롤러코스터’ 같다. B급 유머는 여전하지만, 산만함은 덜고 사회 풍자적인 메시지까지 담으면서 감독으로서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비중 있게 등장하는 캐릭터가 10명에 달한다. 하정우·김의성·이동휘·박병은·강말금·차주영·박해수 등 연기력을 인정받은 개성파 배우가 총출동한다. 배우 겸 감독답게 캐릭터 하나하나가 돋보이게 신경 쓴 티가 난다. 야망은 크지만 뇌가 작은 장관, 청렴결백한 척하지만 여자 골퍼에게 집적대는 고위 공무원, 로비를 알선하는 기자 등 정상인 캐릭터를 찾아보기 어렵다. 접대 골프에 동원된 프로 골퍼 역의 강해림이나 더러운 일도 깨끗하게 처리하는 인턴 역의 엄하늘 등 무명 배우를 적극 활용해 신선함을 더했다. 출연 배우들은 ‘감독 하정우’에 대해 “배우의 미세한 변화도 귀신같이 포착하는 감독”(박병은), “대한민국 감독 중 가장 연기 잘하는 감독”(최시원)이라는 평을 남겼다.

영화 '로비' /쇼박스

하정우표 유머란 이런 식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이제 고3 올라가는데 한마디 해주세요”라는 팬에게는 “올라가세요”, “저희 집 강아지 이름은 원두예요”라는 댓글엔 “냄새 좋겠네요”라고 툭툭 던진다. 그가 각본을 쓴 ‘로비’ 역시 이런 유의 심심한 개그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박장대소까진 아니어도 여러 번 실소가 터진다. “뇌 빼고 본다”는 유행어처럼, 생각 없이 가볍게 보기 좋은 팝콘 무비다. 많은 양의 대사를 빠른 호흡으로 주고받기 때문에, 말맛을 살리기 위해 수십 번 대본 리딩을 거쳤다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돌아가신 엄마가 NBA 광팬이었다거나, 아버지 치킨 사업이 망해 채식주의자가 됐다는 등 진지한 상황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개그로 피식피식 웃음이 새 나온다. 다만 유머 코드가 맞지 않는다면 실없고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OTT가 아닌 극장에서 봐야 할 이유가 부족하다는 점도 흥행에는 걸림돌이 될 것 같다. 4월 2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