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23번째 레터는 지난 19일 개봉한 영화 ‘컴패니언’입니다. 아니, 그런 영화가 있었어? 첨 들어봐, 이렇게 말씀하실 분들이 대부분이시겠죠. 제목도 뭔가 싶고 포스트도 으잉? 싶은 이 영화, 저도 개봉 영화라 챙겨본다는 생각으로 봤는데, 오호, 의외의 참신함과 흥미로운 질문을 품고 있더군요. 장르는 SF 로맨스 호러 스릴러 정도 되겠고요, 소재만 보면 흔한 것 같은데, 그 익숙함을 각본의 힘으로 넘었습니다. 어떤 이야기이기에 그런지, 최대한 스포 없이 말씀드릴게요. 큰 골격만 두루뭉술 알고 가셔야 꽉찬 재미를 느끼실 수 있는 영화라서요.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영화가 시작하면 매력적인 여주인공, 아이리스가 등장합니다. 마트에서 카트를 밀고 있어요. 저는 첨에 스칼렛 요한슨 동생인가 했는데 소피 대처라는 배우입니다. 과일 코너를 지나다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칩니다. 남자는 수줍게 인사를 건네는데 오렌지를 하나 집었다가 층층이 쌓인 오렌지가 와르르 무너지는 대참사가 발생합니다. 쑥스러워 어쩔줄 몰라하며 자신을 조쉬라고 소개하는 남자. 아이리스는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둘은 지인의 초청을 받아 교외 별장에 가게 되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쉬 배우는 잭 퀘이드, 맥 라이언 아들입니다.)

제가 이번 레터 제목에 ‘AI 연인‘이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에 짐작은 하셨겠지만, 등장 인물 중에 AI 연인이 있습니다. 누군지는 말씀 안 드릴게요. 제목처럼 누가 진짜 컴패니언(companion, 반려자)인지 맞혀보세요. AI를 애정의 대상으로 보여준 영화는 스필버그의 ‘AI’(2001), 스칼렛 요한슨의 ‘그녀(Her, 2017)‘를 포함해서 워낙 여럿이라 식상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컴패니언‘은 그 존재를 소개하는 방식에 스릴러 요소를 적절히 가미했어요. 스필버그 ‘AI’처럼 장대하지 않고요, AI가 우리에게 던지는 인식론적 질문을 무겁지 않게, 그러면서도 끝까지 흥미를 자극하면서 풀어나갑니다. 특히 요즘처럼 AI가 일상 대화에 수시로 오르는 때엔 ‘이건 곧바로 닥칠 얘기겠구나’ 생각이 절로.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는거,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치 않는 명제잖아요. 그 외로움을 가까이에 있는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이 나서겠지요. 사람이 아닌 줄 알면서도, 자신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더 알아주는 AI라면,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쉽게 그 마음을 버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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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패니언‘의 각본을 말씀드렸는데, 제가 최근 본 가장 도전적인 각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영화 도입에서 아이리스가 조쉬를 만날 때 아이리스 독백이 나오는데요, 그 독백이 관객을 약간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럽게 만들거든요. 진짤까, 나중에 뒤집어질까, 어쩌려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여러 생각이 드는데, 영화 결말에 똑같은 대사가 나옵니다. 말 그대로 수미상관.

그런데 영화 결말을 보고 나면 같은 대사인데 완전히 다르게 다가와요. 다른 등장인물들이 했던 말들도 되짚어 보면 역시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고요. 똑같은 대사로 시작해서 똑같은 대사로 끝나게 만든다. 발상이야 누구든 할 수 있겠지만 그걸 ‘컴패니언‘처럼 빈틈없이 해내긴 어려울 듯 합니다. 별장에 모인 6명 중에 나중에 알고보면 전혀 다른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인물이 아무도 없습니다. 재치있는 레퍼런스도 나오는데 예를 들어 대놓고 ‘터미네이터2’를 연상시키려고 만든 부분도 있어요. 의상이며 행동이며 심지어 이름까지. 자세히 말씀드리면 재미가 그만큼 줄어드니까, 쉿.

많은 생각이 든 대사가 있었는데요, AI 연인에게 다른 등장인물이 말해요. “너의 머리 속에 있는 기억은 다 조작된거야, 그건 사실이 아니야”라고요. 그러자 AI연인이 답해요. “그 기억은 사실이 아닐지 몰라도,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야.” 조작된 기억 때문에 생겨난 감정일지라도, 그 감정조차 조작일지라도, 그 기억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 기억을 기억하기 때문에 너는 나에게 의미있는 존재이고, 너의 의미를 알고 있는 나 역시 고유한 기억을 가진 존재라는 얘기. 저 대사를 하고 AI 연인이 어떤 선택을 하는데 저는 약간 놀랐습니다. 많이 다른 영화지만 ‘블레이드 러너‘가 잠시 떠오르더군요. 이 역시 보셔야 아실 수 있는데, 제가 자꾸 이렇게 말씀드리니 읽으면서 답답하실 수 있지만, 어쩌겠습니까. 모든 것이 여러분의 영화 관람을 위해서인 것을.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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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에 아이리스와 조쉬가 자동주행 전기차를 타는데, 현대 아이오닉입니다. 영화에 아이오닉 말고 테슬라도 나오는데요, 가장 마지막에 등장인물이 타는 차는 휘발유 많이 먹어보이는 머스탱 컨버터블입니다. 기술이고 뭐고 저리가라는 선언으로 보이더군요. 아, 등급 알고 가세요. 청불입니다. 그 별장에서 피를 많이 보게 됩니다.

‘컴패니언‘의 결말부에서 과도하게 강조되는 고정된 남성상/여성상 묘사는 많이 아쉬웠습니다. 틀을 깨자고 그렇게 만들었을텐데 오히려 편견을 강화하는게 아닌가 싶었어요. 남자라고 다 그렇지 않고 여자라고 다 그렇지 않잖아요. 차라리 이 영화의 남녀를 역전시켰으면 확실히 그 틀을 깼을 거 같네요. 그래도 이 영화의 재미를 완전히 소거시킬 정도는 아니라서 살짝 언급만 해보았습니다.

‘컴패니언’ 상영관이 그새 많이 줄었는데, 주변에 상영관이 있고 시간이 맞다면 선택해보세요. 배급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인데 ‘미키17’도 그렇고 자사 영화 홍보 마케팅에 그다지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미키17’이 300만도 안 되다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초반 홍보 마케팅도 포인트가 빗나가는게 아닌가 느꼈는데 결국 이런 결과가 됐네요. 안타깝습니다. 아, 이번 레터는 늘 하단에 붙이던 예고편을 안 붙이겠습니다. 예고편에 너무 많은 걸 누설해놔서 관람에 방해될 거 같아서요. 그렇게 많이 노출하지 않고도 재밌는 예고편 만들 수 있었을텐데, 다시 한 번, 워너, 안타깝습니다.

다음 레터에선 영화 ‘승부’ 얘길 해드릴까해요. 저희 지면에 리뷰 기사를 썼는데, 그 기사를 위해 조훈현, 이창호 두 분의 자서전을 다 읽었거든요. 흠흠. 지면 기사에 미처 다 못 쓴 두 분의 스토리 위주로 보내드려볼까 합니다. 그럼, 다음 레터에서 뵐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