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교와 연출 하나 없이 찍은 자연다큐멘터리에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장면일 찍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정지 화면도 마찬가지예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장면을 포착했을 뿐인데 비현실적일정도로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구도가 만들어졌어요. 오늘 소개해드릴 이 사진처럼요.
케빈 프루즈가 촬영해 남플로리다 습지협회 페이스북 등의 계정에 올라온 사진이에요. 아주 기다란 몸뚱이를 가진 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몸의 절반은 화려한 색채의 고리무늬를 하고 있고, 나머지 절반은 칙칙한 잿빛을 하고 있어요. 마치 전혀 다른 패턴의 몸색깔을 가진 두 뱀의 몸뚱아리를 이어붙이는 식으로 합성한 것 같아요. 과연 그럴까요? 색깔이 급변하는 곳을 확대해봅니다.
그렇습니다. 삼킴의 현장이었어요. 삼킴의 주체는 화려한 색채의 뱀입니다. 입을 있는대로 쩍 벌리고 제 몸의 굵기와 엇비슷한 사냥감을 위장속으로 천천히 그러나 강력하게 흡입합니다. 이 장면에다 말풍선을 그려넣는다면 이 단어가 어떨까요? ‘꾸역꾸역’. 이렇게 꾸역꾸역 폭풍 먹방 중인 아름다운 무늬의 뱀의 정체는 산호뱀이예요. 몸길이는 기껏해야 50~70㎝ 정도니 뱀중에선 소형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덩치만으로 얕잡아봐선 큰일입니다. 뱀 월드에서 가장 치명적인 문파인 코브라파(派)에 속하거든요.
양옆으로 잔뜩 부풀린 둥그스름한 마름모꼴 머리로 유명한 독사 중의 독사 코브라는, 인도와 아프리카에사는 정통 코브라로 많이 알려졌지만 그 친척들이 제법 지구촌 널리 분포해있습니다. 한 번에 사람 50명을 잡을 수 있는 맹독을 품은 것으로 악명높은 오세아니아의 대표독사 타이판이 코브라 가문에 속해있어요. 그리고 이 일파가 아메리카 대륙에도 터를 잡았으니 바로 오늘의 포식자 산호뱀입니다.
산호뱀의 서식지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멕시코 서부와 중앙아메리카를 지나 아마존을 거쳐 브라질 중남부까지 뻗어있습니다. 아나콘다·미시시피악어·카이만 등 미주대륙의 토종 괴물 파충류들과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빨강·검정·노랑·하양 등의 색깔들로 이뤄진 선명한 고리무늬는 이 부류의 상징입니다.
뱀의 대표적인 식사거리는 개구리나 두꺼비죠. 하지만 개구리·두꺼비들에게 산호뱀은 어쩌면 악마의 모습을 한 구세주 천사일지 모릅니다. 산호뱀은 거의 100% 자신과 같은 파충류를 잡아먹고 살아가거든요. 주된 식사감은 제 몸보다도 작은 뱀과 도마뱀입니다. 산호뱀 말고도 뱀 중에는 기묘하게도 자신과 똑 같은 꼴의 몸을 한 뱀을 집중적으로 사냥하는 부류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대표종이 미주 대륙에 터잡고 살아갑니다. 바로 왕뱀입니다.
덩치, 신체 구조, 사냥 습성 등에서 산호뱀과 왕뱀 이 두 뱀은 천양지차의 모습을 보입니다. 사실 ‘뱀 먹는 뱀’으로 더 유명한 건 왕뱀입니다. 몸길이가 산호뱀의 세 배인 2m이를 정도로 당당한 몸집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독은 없습니다. 그대신 독에 대한 면역성, 그리고 무지막지한 악력을 갖췄습니다. 왕뱀의 먹잇감으로 포착된 뒤 꼬리를 떨며 저항하는 방울뱀의 위협에 아랑곳않고 온몸으로 칭칭 감아 혈관을 투두둑 터뜨리며 죄어죽인 다음 축 늘어진 산송장이 된 먹잇감을 야금야금 삼키는 장면이 압권이예요. 이 장면을 생생하게 포착한 사진입니다.
그에 비해 산호뱀은 철저히 독에 의존합니다. 코브라파에서도 두드러진 맹독을 품고 있는 놈은 먹잇감을 발견하면 단박에 독니로 독을 주입해 그 자리에서 혼을 빼내고 심장박동을 멈추게 한 뒤 꿀꺽꿀꺽 삼킵니다. 이 산호뱀의 뱃속으로 슬픈 여정을 떠난 사진 속 먹잇감도 이미 독이 전신에 퍼진 사실상의 고깃덩이일 겁니다.
하지만 사진을 확대해보니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어요. 원통형의 기다란 몸뚱아리와 전신을 덮은 비늘 때문에 응당 가터뱀같은 흔한 물뱀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도마뱀이었습니다. 아니 네 발이 없이 비늘투성이의 몸뚱이를 가졌는데 뱀이 아니라 도마뱀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네 발이 없어 뱀처럼 꾸불텅거리면서 기어다니는 도마뱀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무족(無足)도마뱀이에요.
파충류 4대 문파(뱀·도마뱀·거북·악어) 중 뱀과 도마뱀은 분류학적으로 매우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둘의 선후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네 발로 기어다니던 도마뱀이 거추장스러운 네 발을 퇴화시키고 뱀으로 진화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 반대의 역순일까요? 전자로 보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무족도마뱀은 그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가장 핵심적 물증으로 꼽혀요. 뱀처럼 네 발이 자취를 감췄지만 비늘의 형태와 눈코입의 형태는 영락없는 도마뱀의 그것이거든요.
돌밑이나 숲의 구덩이 같은 곳을 터전으로 삼고 땅바닥을 스르르 기어다니는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네 발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졌을 겁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완전한 뱀으로 ‘업그레이드’돼갔을 것이라는 거죠. 다리의 퇴화가 사실은 진화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뱀에게 무족도마뱀은 가문의 틀을 다지게끔 해준 머나먼 옛 조상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다만 이는 다분히 인간의 관점입니다. 뱀의 입장에선 얼마간 속을 든든히 채울 먹잇감에 불과합니다. 포식장면을 포착한 사진은 비현실적인 느낌까지 들 정도로 매우 정적입니다. 이미 맹독을 주입받고 숨통이 끊어지고 혼이 빠져나갔기 때문이겠죠. 어쩌면 몸부림 속에 산채로 삼켜지는 것보다, 이처럼 고통없이 포식자의 목구멍속으로 들어가는게 덜 고통스러울지 않을까 싶습니다. 산호뱀으로서는 자신의 몸으로 합체가 될 비련한 희생물에게 몸뚱이가 녹아들기 전에 최후의 자비와 아량을 베풀어준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