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면서 소설도 쓰고 번역도 하는 고은지(37)는 최근 미국에서 주목받는 한국계 작가다. 2020년 에세이 ‘마법 같은 언어’로 워싱턴주 도서상, 퍼시픽 노스웨스트 도서상, AAAS(Association of Asian American Studies) 도서상을 받았다. 지난달 국내에 번역·출간됐다. 시애틀에 거주하는 그를 이메일로 만났다.
‘마법 같은 언어’는 모녀 관계를 다룬 자전적 에세이다. 열다섯 살 때 작가의 아버지는 한국의 한 기업에서 3년 계약의 임원급 일자리를 제안받는다. 부모는 고 작가와 그의 오빠를 캘리포니아에 남겨두고 떠난다. 3년 계약은 연장을 거듭해 7년으로 늘어난다.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던 소녀는 엄마가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내온 손 편지를 고이 모아둔다.
남아있던 편지 49통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 출발점이 됐다. 멘토 최돈미 시인(김혜순 시 영역자)이 ‘불교 전통에서 49라는 숫자는 죽은 영혼이 사후 세계로 건너가기 전에 답을 찾기 위해 이 땅을 헤매는 날의 수’라고 알려줬다. 고 작가는 “그 말을 듣고 이 편지를 번역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편지의 맥락을 채우기 위해” 엄마의 편지 10편과 자신의 글을 교차 구성하는 방식으로 산문을 썼다.
‘내가 부엌에서 하려 했던 말은 여섯 살 때부터 생선을, 그 하얀 살점과 바삭한 껍질을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그걸 기다려온 탓에 그 부드러운 살점의 이미지는 이제 다 썩어 없어지고 화석이 될 뼈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부엌에서 언쟁을 벌였을 땐 내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227쪽)
엄마의 부재와 방치. 버려진 듯한 사춘기 시절을 보낸 작가는 상처가 깊다. 책은 ‘현재는 과거의 복수다. 한국엔 전생에 자신이 가장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의 딸로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해 ‘그리고 나는 엄마를 놓아주었다. 처음으로’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엄마에게 복수하고픈 마음과 용서하고픈 마음이 복잡하게 얽혔다가, 끝내 풀린다. 고 작가는 “저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머니 생각을 할 때면 습관적인 그리움으로 깊이 침전하곤 한다”며 “어머니를 놓아주는 일이 곧 자유로 향하는 길이었다”고 했다.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 엄마와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점에서 미셸 자우너의 베스트셀러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터. 고 작가는 “무엇이 한국인다운 것이고 무엇이 미국인다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이 질문은 한국계 미국인들의 꼬리표와 신분증을 떠나 개인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과 깊이 얽혀 있다”며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 작업이 품은 난관을 확장하고 넘어서고 있다”고 했다.
드라마 ‘파친코’ ‘성난 사람들’, 영화 ‘미나리’ ‘패스트 라이브스’ 등 최근 영미권에선 한국 디아스포라(이주) 서사가 유행한다. 고 작가는 “언어적·역사적·지리적 경계에 더해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를 마주하며 디아스포라로서 우리에게 부여된 도전을 늘 인식하고 민감성을 유지해야 한다”며 “그 결과가 문학과 예술 등 분야에서 왕성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유행을 좇은 결과가 아니다. 이방인으로서 날 선 감각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 덕분이다.
☞고은지(37)
미국에선 E.J. Koh로 활동한다. 2017년 시집 ‘시시한 사랑’을 펴내며 데뷔했다. 장편소설 ‘해방자들’로 지난해 뉴욕 공공도서관 젊은사자상을 받았다. 35세 이하 주목할 만한 미국의 젊은 작가들에게 주는 상. 이 밖에 이원 시인의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를 영어로 번역해 한국문학번역원 번역 대상을 받았고, 애플 TV+ 시리즈 ‘파친코’ 작가진으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