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노라 노라는 이름과 ‘패션’이란 말이 낯설지 않게 된 것은 미스코리아 오현주양 덕택이다. 1959년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미스코리아 오현주양이 ‘아리랑 드레스’란 애칭을 얻은 양단 드레스로 의상상을 탔다. 한복 선을 살린 아리랑 드레스는 이후 외교 사절 부인들의 유니폼처럼 세계 곳곳에 한국을 알렸다.”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로 꼽히는 노라 노는 1999년 11월23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나의 20세기’에서 1950년대 한국 패션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가 미국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1949년 귀국했을 때 “우리나라의 일인당 GNP는 겨우 87달러, ‘몸빼’바지가 생활복인 현실”이었다고 한다. 패션이라는 말조차 낯설었던 시절에 한국 최초 세계 미인대회 참가자의 드레스가 패션의 힘과 한복의 미를 국내외에 알렸다는 것이다. 당시 오현주가 입었던 아리랑 드레스는 “한복의 치마 저고리 유형을 서양복 드레스화한 디자인으로 새로운 형태의 한복 디자인에 영감을 줬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노라 노의 아리랑 드레스(신혜순 재현)가 19일 서울생활사박물관(노원구 동일로 174길 27)에서 개막한 ‘서울멋쟁이’에 전시된다. 8·15 해방과 6·25 전쟁 이후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멋을 추구해온 자취를 서울 사람들의 의생활을 통해 돌아보는 전시다. 서울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어왔고 지금 입고 있는지 조명한 이 전시의 주제는 패션을 통해 돌아본 한국 현대사이기도 하다. 아리랑 드레스를 비롯한 의상, 사진 등 전시 자료들은 맨바닥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워야 했던 그 시절에도 세상이 궁핍과 빈곤으로 가득하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전시는 광복 이후 1990년대까지 서울 사람들의 의생활 변화를 돌아보는 ‘서울패션의 탄생’과 현재 서울 사람들의 생활 속 옷차림을 살펴보는 ‘오늘날 서울사람들의 패션’ 두 부문으로 나뉜다. ‘서울패션의 탄생’에서는 우선 6·25 이후 ‘양장화’의 바람 속에 전통과 서구 복식이 결합하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양단 저고리에 벨벳 치마를 매치한 한복이나 노라 노의 아리랑 드레스가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1960년대에는 명동의 양장점들을 중심으로 ‘서울 패션’이 시작된다. 당시 발행된 ‘서울 안내도 명동편’에는 명동·을지로 일대 지도에 ‘칠성화점’ ‘송옥양장점’ 등이 꼼꼼하게 표기돼 있어 패션이 당시 서울 중심가 상권의 한 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에는 수출액 100억달러 달성으로 상징되는 경제 성장이 본격화하면서 청년 문화가 싹트기 시작한다. 이는 ‘죠다쉬’를 필두로 하는 1980년대 청바지 붐으로 이어졌으며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경범죄로 단속하는 촌극을 낳기도 했다.
1980년대는 컬러TV 방송의 시작으로 옷에 대한 정보가 생생하게 전달되면서 대중의 관심이 확대되고, 교복 자율화와 88 서울올림픽의 영향으로 캐주얼과 스포츠웨어 시장이 확대됐다. 1990년대에는 소비 문화의 확장과 함께 명동·압구정·홍대·이대·동대문 등 ‘패션 중심지’가 형성되고 패션 잡지들이 활발히 창간되며 유행을 선도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서울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전시에서는 서울 거주 20~60대 성인 2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생활 심층 조사 결과를 공개한다. 일러스트로 표현한 세대별 패션의 특징이 흥미롭다. 온라인 쇼핑으로 옷을 구입하는 20대는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패션이 특징. 본격적으로 사회 생활에 참여하는 30대는 비즈니스 캐주얼을 주로 입고, 은퇴 이후의 60대는 등산복을 비롯해 정형화된 패션을 고집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 사이에서 40~50대는 격식을 갖추면서도 위·아래 세대와 차별화를 시도하는 특성을 보인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 내년 3월27일까지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문의 (02)3399-2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