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실사 영화 ‘뮬란’의 주인공 뮬란은 1998년 애니메이션보다 진일보한 더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전사 캐릭터다.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극장에 걸리기 전 갖은 논란부터 일으킨 월트디즈니 영화 ‘뮬란’(감독 니키 카로)이 17일 국내 개봉했다. 아버지 대신 전쟁터에 나간 용맹한 딸이 가족도 구하고 나라도 구한다는 중국 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 애니메이션(1998)이 원작.

디즈니는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 등 고전 애니메이션을 실사 영화로 만들어 편당 10억달러(약 1조1700억원) 안팎의 천문학적 매출을 올려왔다. 흥행이 보장된 고전은 새로운 아이디어로 만드는 신작의 시장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영리한 전략. 특히 중국 등 아시아 시장이 디즈니의 이런 전략에 충실히 부응해온 ‘캐시 카우’였다. 하지만 ‘뮬란’은 디즈니의 도를 넘어버린 영리함이 자승자박의 결과를 낳는 첫 케이스가 될 지도 모른다.

개봉일인 17일 오후 6시 영화관 통합전산망 실시간 예매율은 28.1%인 ‘테넷’에 이어 26.9%로 2위. 그러나 하루 총 관객 수가 4만명을 겨우 넘길 만큼 시장 상황이 악화돼 있다. 관객 반응은 “영어로 대화하는 중국 영화” “디즈니가 공산당에 영혼을 팔았나” 같은 혹평과 “원작 팬인데 재밌었다” “색감 화려하고 영상미 멋지다” 등의 호평이 엇갈렸다. 추천 수는 혹평 쪽이더 많았다.

애니메이션 ‘뮬란’이 개봉한 1998년 무렵은 중국에 ‘도광양회(韜光養晦·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름)’의 시기였다. 원작에서 떠밀리듯 자신이 여성임을 폭로당했던 뮬란은 이번 실사 영화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이 여성임을 밝힌다. 디즈니 공주 영화의 문법에 따라 삽입됐던 로맨스도 이번 영화에선 비중이 낮다. 당당한 여성 주인공 서사로는 진일보한 셈이다.

하지만 원작과 실사 영화 사이 20여 년 동안 중국은 ‘대국굴기(大國崛起·큰 나라로 우뚝 섬)’의 시기를 맞았다. 미국 다음 세계 2위 영화 시장이며, 마블 시리즈 등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영화의 성패를 가를 만큼 중요해졌다.

새로운 ‘뮬란’에는 디즈니가 중국인 맘에 드는 무협 액션물로 만들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영화 도입부에선 중앙아시아 복식의 사람들이 사는 평화로운 성을 중국인 병사들이 지키며 외적의 침략에 맞선다. 공산당 외교 기조라는 ‘조화로운 세계(和諧世界)’의 영화적 표현을 디즈니 영화에서 보는 것은 낯설고 무서운 일이다. 중국의 돈 앞에서, 디즈니는 한족의 대륙 지배가 비교적 최근 일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눈을 감았다.

디즈니는 현실에도 눈을 감았다. ‘뮬란’을 연기한 중국계 미국인 배우 류이페이(劉亦菲)는 민주화 시위대를 탄압하는 홍콩 경찰을 대놓고 응원하며 세계적 ‘뮬란 보이콧’ 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디즈니는 영화 엔딩 크레딧에 100만명을 수용소에 감금한 것으로 알려진 신장·위구르 지역 공산당에 대한 감사 인사를 서슴없이 집어 넣었다.

그런데도 중국 시장은 ‘뮬란’에 냉담했다. 지난 11일 개봉 뒤 대체로 박스오피스 2위. 1위는 국민당과 공산당 결사대가 힘을 합쳐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다는 내용의 영화 ’800′이다. 중국 평점 사이트 ‘더우반(豆瓣)’에서 16만명 넘게 참여한 관객 별점은 10점 만점에 4.9점으로 참담한 수준. 이전 디즈니 영화는 대개 7~8점 이상의 높은 점수를 받았다.

남북조 시대 북중국 배경인 영화 속 뮬란의 집을 중국 남부에 수백년 뒤에나 생겨나는 원형 집단거주지 ‘투러우(土樓)’로 설정하는 등 곳곳에 고증 실패와 문화적 몰이해도 드러났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환구시보는 “낮은 예술적 수준, 중국 문화에 대한 오해로 이 영화는 실패”라고 보도했다. 이후 중국 정부는 아예 ‘뮬란’ 보도 금지령을 내렸다. 디즈니는 ‘중국몽’에 무릎 꿇고도 따귀만 맞은 셈이다.

중국 영화 전문가인 한국외대 임대근 교수는 “디즈니 ‘뮬란’은 중국 시장을 노리다 이야기의 보편적 호소력도 디즈니적 상상력의 장점도 모두 잃었다. 디즈니다운 스토리텔링의 위기를 보여주는 징후”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