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나무 속살 같은 황색 톤의 세련되고 미니멀한 무대 위, 오롯이 우리 소리가 먼저 보이고 들린다. 국립창극단 ‘심청가’는 2018년 초연 때부터 ‘본질을 파고들자 오히려 더 힘 있고 새로워졌다’는 호평을 받았던 작품. 최근 창극은 올리는 작품마다 전석 매진 사례가 잇따르고 이름난 창작자들이 몰리며, 해외 공연에서도 주목받는 가장 뜨거운 공연 장르가 됐다.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 웹툰까지 종횡무진 흡수하는 창극의 진화 속에, 판소리 다섯 바탕 중 하나인 ‘심청가’의 가장 중요한 ‘눈대목’만 뽑아낸 이번 공연은 우리 소리의 뿌리를 단단히 하고 원형을 되짚어 돌아보는 의미가 크다.
창극 ‘심청가’는 추석 연휴 직전인 26일 개막해 10월 1일까지 서울 남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딱 엿새 동안의 재연을 앞두고 있다. 우리 문화의 정수를 무대 위에 옮기는 일에 평생을 매진해 온 손진책(75) 연출가와 이 창극의 작창(作唱)자이자 초연 때 직접 무대 위 도창(導唱)을 맡아 극을 이끈 안숙선(74) 명창을 최근 국립창극단 연습실에서 만났다. 건강 기복이 있는 안 명창은 만난 자리에서 몇 가지 질문에 먼저 답한 뒤 서면으로 보충 답변을 보내왔다.
지난 8월 세계 최대 공연 축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는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이 영국 가디언 지의 별 5개 만점을 받는 등 화제를 모았다. 손 연출은 “1980년대 말 ‘심청가’를 동유럽과 일본에서 공연할 때도 최고 극장의 최고 관객들에게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때도 난 우리 전통으로 세계에서 승부를 걸 수 있는 것은 판소리 창극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일본엔 가부키(歌舞伎), 중국엔 경극(京劇)이 있는데 왜 우린 없냐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없어요? 우리에겐 판소리, 판소리 창극이 있어요.”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예술감독까지 지낸 안 명창 역시 창극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본 이들 중 한 사람이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이 이어지는데 외국 손님들에게 우리 문화와 소리를 알리려면 창극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판소리 기반의 우리 음악 종합 세트지만, 관객이 즐기기엔 더 쉽고 재미있으니까요. 뮤지컬이나 오페라와 비교해도 예술적, 대중적으로 모자람이 없어요.”
창극이 인기 장르가 되면서 해외 유명 연출가와의 협업, SF나 스릴러 창극까지 새로운 실험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무대는 점점 화려하고 커졌다. 절제된 무대로 우리 소리의 아름다움을 최대치로 부각하는 ‘심청가’는 트렌드를 거꾸로 거슬러서 오히려 더 귀한 작품이 됐다. 손 연출은 “새로운 모색과 과감한 실험도 중요하지만 어떤 본령(本領), 수원지(水源池)이자 박물관적 역할을 할 원형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번 ‘심청가’는 서구적 연극 기호가 아니라 우리 판 놀음의 연극 기호와 우리 소리로만 된, 판소리 자체가 극이 되는 판소리 창극이에요. 애조 띤 강산제 중에서도 가장 판소리의 맛이 고급스럽게 드러나는, 오페라 아리아와 흡사한 ‘더늠’ 부분만 뽑아 대본을 만들었지요. 작창을 맡은 안 선생은 전설적 명창 성우향(1935~2014) 선생께 직접 바로 그 강산제 심청가를 사사한 분입니다.”
안 명창이 거들었다. “저 역시 다섯 바탕을 기본으로 하는 창극은 전통 양식과 구성을 복원하고 지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래전부터 외국 재즈 밴드와의 협연 같은 것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우리 소리가 변형되거나 들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지요. 이번 ‘심청가’의 기조 역시 우리 전통 소리를 제대로 보여준다는 것이고요.”
‘심청가’의 눈대목만 가려뽑은 만큼 절창이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손 연출은 “심청이가 제물로 팔려 배를 타고 둥둥 인당수로 떠나는 부분인 ‘범피중류(泛彼中流)’에 주목해 보라”고 했다. “소리꾼만 26명, 악사 포함 35명 모든 출연자가 참여해 우리 소리의 힘을 거대하게 증폭시키는 창극 코러스의 힘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
안 명창은 “역시 ‘심청가’ 최고 눈대목은 심 봉사 눈 뜨는 장면”이라고 했다. “세상에 제일 불쌍한 것이 뭐가 뭔지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것 아니겠어요.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 장면에서 눈을 뜨는 것은 심 봉사뿐 아니라 관객 모두이기도 하지요. 모두가 함께 답답함을 ‘휙~’ 허니 날려버리고 맑은 세상을 본다고 하는 것이니까.”
지금 창극이 인기라지만, 관객은 변덕이 심하고 어떤 장르도 흥망성쇠를 겪는다. 손 연출은 “창작자들이 정말 우리 창극이 좋아서 확장하고 싶다면 판소리와 우리 민속극에 애정을 갖고 깊이 공부하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우리 문화는 배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본이 있어야 새로운 실험도 가능하죠. 태만하거나 안주하면 창극도 어느 순간 다시 시시하고 지루해질지 모릅니다.”
안 명창은 여전히 창극이 낯선 관객에게 “그냥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즐겨 보시라”고 권했다. “따분하거나 어렵지 않을까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그냥 마음을 열고 즐기시면 됩니다. 우리 음악이 가진 흥과 한은 우리 민족 모두가 가진 공통 감정이잖아요. 그러면 ‘심청가’가 여러분 마음에 그대로 잘 안겨 들 것입니다.”
이번 ‘심청가’의 도창은 안 명창 대신 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인 김금미 창극단 단원이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