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이라도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한다면 속이 까맣게 타버릴 것이다. 10년, 14년, 10년…. 크리스마스와 겨울방학 관객을 겨냥한 대극장 뮤지컬이 쏟아지는 연말연시, 1~2년 간격으로 다시 공연되는 작품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오랜 기다림을 보상할 화제작도 관객과 만난다. 브로드웨이 데뷔 10년 만에 뉴욕 프로덕션 그대로 한국 극장에서 선보이는 ‘알라딘’(제작 에스앤코), 14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온 ‘틱틱붐’(신시컴퍼니), 무대에서 가장 빛나는 배우 전미도가 10년 만에 여주인공으로 돌아오는 ‘베르테르’(CJ ENM).<그래픽> 이래저래 꽉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줄, 오랜 기다림이 아깝지 않은 뮤지컬이다.
◇뉴욕의 화려함 그대로 ‘알라딘’
이 뮤지컬의 매력을 형용사 3개로 요약한다면 ‘화려하다’, ‘행복하다’, ‘착하다’일 것이다. 세계 2000만 관객이 본 오리지널 무대를 그대로 옮겨온 ‘레플리카’ 뮤지컬. 애니메이션과 영화로도 익숙한 ‘아라비안 나이츠’ ‘프린스 알리’ 같은 곡을 라이브 연주와 노래로 들으면 핏줄 속으로 흥겨움이 스며들어 온몸을 둥둥 울리며 흘러가는 듯 몸이 들썩인다. 음악뿐 아니라 무대도 어느 한순간 화려하지 않은 때가 없다. 특히 ‘알라딘’(김준수·서경수·박강현)이 램프를 가지러 들어간 신비의 동굴에서 요정 ‘지니’(정성화·정원영·강홍석)와 만나는 장면은 가장 놀랍다. 특수 효과의 도움 없이 수작업으로 만든 황금빛 동굴과 보물이 수천개의 명품 크리스털을 사용한 의상과 함께 조명을 받아 반짝이면 그 빛이 객석까지 물결친다.
지니가 20여 분 몰아치듯 유머러스한 춤과 노래를 마치고 숨을 몰아쉬면 관객은 폭소하며 엄청난 환호를 보낸다. 무대 위 알라딘과 ‘자스민’(이성경·민경아·최지혜) 공주가 마법 양탄자를 타고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날아가며 ‘새로운 세상(A Whole New World)’를 부를 때면 보는 사람도 행복해진다. 배배 꼬인 서사, 슬픈 결말의 이야기가 대접받는 시대, 힘든 일이 있어도 조금만 견디면 곧 악인은 벌을 받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착한 이야기는 오히려 귀해 더 반갑다. 알라딘이 “너 어디서 왔니?” 하고 물으면 지니가 “잠실역 3번 출구”라고 답하는 식으로 한국 현지화된 대사들도 웃음 포인트다. 가족이 함께 보기 딱 좋은 작품.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게 유일한 단점이다.
◇창작 초연인 듯 새로운 ‘틱틱붐’
요절한 작곡가 조너선 라슨(1960~1996)은 뮤지컬 ‘렌트’의 오프 브로드웨이 공연 개막 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며 한 작품으로 브로드웨이의 전설이 됐다. ‘렌트’가 정체 모를 질병이 휩쓸던 세기말 뉴욕을 배경으로 젊은 예술가들의 꺾이지 않는 꿈을 노래했다면, 라슨의 유작인 ‘틱틱붐’은 서른 살을 앞두고 전도유망하다는 평가에도 이룬 것이 없어 자꾸 주눅이 드는 뮤지컬 작곡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제목은 시한폭탄 초침 소리처럼 조여오는 젊은 예술가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청각적으로 상징한다.
그가 죽은 지 6년 뒤인 2001년 미국에서 처음 공연했지만, 신시컴퍼니가 14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린 이번 프로덕션은 마치 창작 초연 작품인 듯 완전히 새롭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맛깔나는 번역으로 이름난 황석희 번역가가 연극적인 대사와 가사들을 말맛을 살려 고쳐 썼고, 대본과 음악만 가져오는 ‘논 레플리카’ 라이선스 공연의 장점을 살려 3인극인 원작에 앙상블 배우 5명을 함께 무대에 올리면서 노래와 음악도 풍성해졌다. 가로, 세로, 높이 모두 6m를 넘는 커다란 정글짐 같은 회전무대에 영리한 조명 사용과 역동적인 안무가 어우러져 차분한 이야기에 강약의 리듬감까지 입혔다.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한국 창작진만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서른이 됐는데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 그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 배우의 꿈을 접고 마케팅 회사 임원으로 성공한 친구와 이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은 여자 친구가 물을 때, 주인공의 마음은 “모두 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제자리, 나만 계속 벽에 머리를 쿵쿵 처박고 있는 것” 같다. 그 마음은 빨리도 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30/90′, ‘노 모어’ 등 앤드루 가필드 주연의 동명 넷플릭스 영화로도 익숙한 노래들은 여전히 감미롭고 또 경쾌하다.
◇전설의 ‘로테’ 전미도와의 해후 ‘베르테르’
오래 관객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그만큼 좋은 작품이기 때문. 그래도 관객은 ‘뭐 새로운 건 없나’ 찾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내년 1월 개막하는 뮤지컬 ‘베르테르’의 팬들은 이 작품을 기다려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라이브 무대에서 가장 놀라운 배우 전미도가 2015년 공연 이후 10년 만에 여주인공 ‘로테’로 돌아온다. 2000년 초연 뒤 벌써 25년째, 베르테르의 주연배우들은 그동안 엄기준 ‘엄베르’, 유연석 ‘연베르’, 규현 ‘규베르’ 같은 별명으로 불리며 사랑받았다. 우리 공연계를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고선웅이 괴테의 원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각색한 대본과 가사, 피아노와 현악기 중심의 클래식 실내악처럼 아름다운 음악의 매력은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