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운전 중에 전화를 받았어요. 말문이 막히더라고요.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30분쯤 진정한 뒤 집사람한테 전화했죠. 나보다 더 좋아하며 펄쩍펄쩍 뛰던걸요.”

올해 제35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조명 디자이너 김창기(65) 극동대 연극연기학과 교수는 “처음엔 마냥 기뻤는데, 정신이 들수록 이제 어떤 각오를 해야 하나 복잡한 기분”이라며 웃었다. 조명 디자이너로는 첫 수상자. 공연 스태프 수상자로도 무대미술가인 16회(2006) 박동우와 31회(2021) 이태섭 이후 세 번째다.

제35회 이해랑연극상을 받는 김창기 조명 디자이너는 “새로운 공연을 통해 새로운 희곡과 창작자를 만나며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과정이 늘 행복했기에 여기까지 왔다”며 “무대와 의상을 활용하고 색깔, 각도, 광량을 변화시켜 새로운 시공간을 빚어내는 짜릿함은 조명을 다루는 사람만의 특권”이라고 했다. /장련성 기자

김창기는 지금 ‘한국 공연 조명의 대부’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대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연습에 참여해 지켜보며 창작자·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작업 방식도 정평이 나 있다. 손진책, 한태숙, 이성열, 김광보 등 한국 연극을 대표하는 연출가들과 함께 작업해 왔고, 김성구, 김영빈, 신동선, 최보윤 등 지금 한국 공연을 책임지는 조명 디자이너들이 그에게 조명을 배우고 함께 일해왔다. 그가 이끄는 ‘스테이지 웍스’는 한 해 공연 70~80편을 책임지는 독보적 조명 디자이너 집단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2007)의 뉴욕 브로드웨이 브로드허스트극장 공연 당시 '코제트'의 생모 '팡틴'이 병상에서 마지막 노래 '컴 투 미(Come To Me)'를 부르는 모습. '팡틴' 역 배우는 레아 살롱가, 등을 돌린 '장발장' 역 배우는 알렉산더 제미냐니. /사진가 존 마커스

대학 때는 영어 연극 두어 번 해 본 게 전부인 영문학도였다. 졸업 후 음향 기기 수입 회사에서 일하다, 1989년 여름 출장 간 뉴욕에서 만난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인생 행로를 바꿨다. “코제트의 생모 팡틴이 기구했던 생을 마감하는 순간, 어두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눈부시게 밝아졌던 빛이 흰 잔영을 남기며 사라졌어요. 죽은 자의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처럼요. 아, 이런 게 조명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언어구나. 그걸 처음 느꼈죠.”

첫아기가 태어나던 91년 연극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오하이오대 대학원에서 연극 연출을 공부하던 중, 브로드웨이 조명 디자이너가 지도한 대학원 공연에 참여했다가 한 번 더 그의 길이 바뀌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으로 배우의 심리와 시공간이 끊임없이 바뀌더군요. 확 빠져들었어요. 지도교수를 찾아가 조명을 전공하고 싶다고 말했지요.”

올해 제35회 이해랑연극상을 받는 김창기 조명 디자이너. /장련성 기자

학위 과정을 마치고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머물며 실무를 익힌 뒤 96년 초에 귀국했다. 젊은 김창기는 거침이 없었다. 업종별 전화번호부의 극단 항목을 뒤져서 마음에 뒀던 연출가의 극단에 전화를 걸었다. “나를 조명으로 써달라”고 먼저 제안한 것이다. 극단 미추의 손진책 연출이 먼저 응답했다. 그해 11월 예술의전당에서 독일 연출가 작품으로 조명감독 공식 데뷔를 했다.

그는 “모든 게 창작 의욕이 뜨거운 좋은 연출가 선생님들을 만난 덕분”이라고 했다. “손진책 선생께는 한국적 서정성을 배우며 한국적 빛의 표현을 고민했어요. 한태숙 선생께는 절제된 색과 날카로운 각, 인간 심리에 주목하는 드라마의 강력한 증폭을 배웠습니다. 이성열 연출과는 사실주의 연극, 표현주의적 시도도 많이 했고, 강렬한 드라마를 좋아했던 김광보 연출과 박상륭 작가의 ‘뙤약볕’을 연극으로 만들며 배우가 땀을 뻘뻘 흘릴 만큼의 진짜 뙤약볕을 조명으로 만들어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조명은 공연의 시각적 최종 결정권자”라는 것이 그의 지론. 매년 조명의 각도, 컬러, 리얼리즘 등 자신만의 테마를 정하고 실험과 탐구를 계속할수록 그의 명성도 쌓여갔다.

올해 제35회 이해랑연극상을 받는 김창기 조명 디자이너. /장련성 기자

그는 새로운 빛을 만들어내는 창의성의 비결로 ‘의도적 블랙아웃(black-out)’을 꼽았다. “제가 ‘햄릿’ 조명을 맡으면 다른 ‘햄릿’ 공연 자료는 싹 치워버립니다. 의도적으로 ‘블랙아웃’된 생각의 공간을 만드는 거죠. 다른 공연 이미지에 압도되면 새로운 생각을 못 해요. 안 풀리면 대본을 한 번 더 읽고 연습을 더 집중해서 봐야죠. 젊은 조명 디자이너들에게 늘 강조합니다.”

기억에 남는 무대를 묻자, 그는 어느 하나를 고르기 어려워했다. “뮤지컬 ‘베르테르’ 초연 땐 김광보 연출이 ‘형, 여기서 베르테르가 마지막을 맞을 건데 조명 말곤 아무것도 없어’ 하더군요.” 김창기는 무대 뒤편의 하늘색 배경막을 빛으로 채색했다. 조명은 엷은 초록색 청춘의 하늘빛에서 불그스름한 가을빛으로, 마지막엔 피처럼 붉어졌다가 검게 암전한다. 배우의 연기 리듬, 음악과 어우러져 지금도 사랑받는 명장면이 태어났다. 한태숙 연출의 ‘신곡(神曲)’에서 하늘 끝처럼 깊고 높은 데로 올라가는 단테를 비추던 빛, 손진책 연출의 ‘햄릿’에서 선왕과 햄릿이 만나는 순간을 비춘 톱(top) 조명의 짜릿함도 오래 남는 기억이다.

뮤지컬 '베르테르'. /CJ ENM

갈수록 공연 예술에서 조명의 중요성이 커진다. 설명적 무대 대신 미니멀하고 단출한 무대가 늘면서, 빛으로 공간을 만들고 드라마를 견인하는 조명도 더 많은 역할을 요구받는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조명이 좋았다’가 아니라 ‘조명도 좋았다’는 말, 앙상블과 조화를 평가받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이해랑 선생께서 초심을 되찾으라고 이 상을 주시는 것 같다”고도 했다. “사실 이제 좀 쉴까 생각도 했거든요. 무대미술가 이태섭 형이 ‘거봐라, 너 이제 못 쉰다’ 하며 웃더라고요. 상 주시는 이유가 이거구나 생각했습니다. 다시 뛰어라, 다시 작업으로 돌아가라는 뜻.” 조명 디자이너 김창기가 자신을 둘러싼 조명의 빛처럼 밝게 웃었다.

☞김창기(65) 조명 디자이너

1996년 데뷔 이후 한국 공연의 ‘빛’을 책임져온 조명 디자이너. 연극 180여 편뿐 아니라, 각각 10편 넘는 마당놀이, 오페라, 뮤지컬, 무용 등에서 조명을 맡았다. 용인대, 상명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가르쳤고, 2004년부터 극동대 연극연기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아연극상(2007),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통령상(2013) 등을 받았다.

심사평

올해 심사의 핵심 키워드는 다양성이다. 기존 수상자들 중에서 남성 배우 및 연출가 비율이 절대적이기에 올해는 연극상의 외연을 확장하고, 다양성을 실천하기 위해 여성 및 스태프를 적극 고려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올해 수상자는 김창기 조명 디자이너이다. 3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연극상에서 조명 디자이너로는 첫 수상자이다. 그는 무대에 명암을 주는 정도의 소극적 기능만 부여되었던 조명에 디자인의 개념을 제시하여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96년 데뷔한 이후 철저한 대본 분석을 통해 작품에 맞는 최적의 빛을 찾아내려는 끈질긴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장면의 의미를 확장하고, 극적 이미지를 제고하는 빛의 조련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상 수상자로는 여전한 현역으로 배우의 아우라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박근형 배우를 선정하였다. 박근형 배우의 연기력은 세세한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최근 ‘고도를 기다리며’ ‘세일즈맨의 죽음’ 등에서 보여준 몰입감 있는 연기는 특히 압도적이었다. 연극이 배우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심사위원 박정자·정중헌·손진책·이화원·이은경·이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