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엔 으스스한 분위기의 문 하나, 작은 의자와 배우 한 명뿐. 처음 자신을 어터슨 변호사라고 소개한 배우는 오직 홀로 신분, 성별, 나이 따위가 다 다른 지킬 박사와 주변 인물 최소 8명을 모두 표현하며 관객과 함께 정체불명의 인물 하이드의 뒤를 밟아간다. 연극 ‘지킬앤하이드’<키워드>를 공연하는 대학로 티오엠 극장의 작은 무대는 매일 저녁 개성 넘치는 배우의 ‘연기 차력쇼’로 달아오른다. 무대 위 단 한 명의 배우가 등을 구부렸다 펴는 몸짓, 말투나 고갯짓 만으로 순식간에 전혀 다른 인물로 변신할 때면 지켜보는 관객의 등줄기에도 짜릿한 전기가 흐르는 듯하다.

◇1인 8역 ‘연기 차력쇼’

배우 홀로 지킬 박사와 주변 인물 모두를 연기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1인극 ‘지킬앤하이드’에서, 무대에 하나뿐인 의자는 폭력에 쓰러진 소녀, 혹은 정체 모를 공포처럼 공기 속을 떠도는 하이드의 흔적을 드러내는 경이로운 연극적 도구다. 무대에서 의자를 들고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해 보이는 배우 최정원(왼쪽)과 백석광. /남강호 기자

‘퍼포머’ 역을 맡아 번갈아 무대에 서는 배우는 4명. 그중 22년 만에 1인극 무대에 도전한 뮤지컬 디바 최정원과 백상예술대상(2020) 연기상을 받은 대학로 스타 배우 백석광을 최근 극장에서 만났다. 상대역 없이 황량한 잿빛 무대에 홀로 선 배우는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조각배 같은 기분 아닐까.

최정원은 “2003년 임영웅 연출가의 모노드라마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하면서 너무 힘들어 많이 울었다. 다시는 1인극은 안 하겠다고 다짐했었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근데 이 작품, 대본을 읽고 또 읽을수록 무대에서 즐겁게 날뛰는 내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거부할 수가 없었어요.” 무대 위의 그는 37년 경력의 뮤지컬 배우답게 유연하고 능글능글하게 관객을 휘어잡는다.

연극 '지킬 앤 하이드'를 연기하는 배우 최정원. /연합뉴스

국립현대무용단과 즉흥 1인극 공연을 한 적이 있는 백석광은 “19세기 고딕 소설과 지금 현재의 간극이 도전으로 느껴졌다. 이 작품이 지금 관객들에게 어떤 말을 걸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가장 진지하고 깊이 있는 캐릭터 분석을 보여주는 백석광답다.

연극 '지킬앤하이드'의 배우 백석광. /연합뉴스

◇“자면서도 대사 외우다 벌떡 일어나”

처음부터 무대에 문과 의자 하나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극 중 등장하는 도끼를 비롯해 무대 옆에 쓰러진 채 놓인 의자들도 원래 다 무대에 있던 것들. 하지만 창작진과 배우들은 연습을 거듭하며 하나씩 비워 나갔다. 배우들이 연습을 거듭하며 연기가 입체감을 얻어 진화하고, 캐릭터에 대한 자신감도 쌓이면서 비우고 덜어낸 것이다. 백석광은 “관객의 상상력이 가장 중요하다. 도끼도 없이 ‘날카로운 도끼날 끝에 빛이 반사된다’고 말할 때 그 번쩍이는 빛을 느끼는 건 상상하는 힘”이라며 “비웠기 때문에 채울 수 있었다”고 했다.

최정원은 “꿈속에서 대사를 외우다 막히면 새벽 3시 반에도 벌떡 일어나 대본을 찾아본다”며 웃었다. “지킬과 하이드의 행적에 대한 단서들이 촘촘하게 숨어 있는 대본이고 한 번 시작하면 90분간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하거든요. 무대에서 실수로 다음 장면으로 건너뛰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하죠.”

◇자극적 ‘엿보기’의 욕망

1인극 '지킬 앤 하이드'의 두 배우 최정원(오른쪽)과 백석광. 지킬 박사 포함 최소 8인의 인물을 홀로 표현한다. /남강호 기자

백석광은 “가장 힘든 건 하이드의 표현이었다”고 했다. “제목엔 지킬과 하이드가 있지만 실제 하이드는 무대에 등장하지 않아요. 공기 속에 떠다니는 입자처럼,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소문 속에서, 혹은 잔혹한 살인 사건 현장을 엿보게 된 목격자의 눈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거든요.” 최정원이 맞장구를 쳤다. “하이드는 없다고 생각하고 공연해요. 하이드는 허깨비 같지만 실재하는 ‘악(惡)’ 그 자체이고, 실은 너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는 거죠.”

무대 위 어터슨 변호사는 하이드의 흔적을 뒤쫓으며 말한다. “완전히 처음 겪는 일을 대비한다는 건 불가능해요. 마치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1인극 '지킬앤하이드'의 두 배우, 최정원(오른쪽)과 백석광. /남강호 기자

백석광은 “어터슨이 전하는 이야기가 진실이라기보다 전해 들은 뜬소문에 가깝고, 참혹한 폭력의 피해자보다 악행 자체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 이 연극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이라고 했다. “문틈으로 타인의 불행을 엿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죠. 자극적인 이슈를 좇는 어터슨은 지금 시대 우리 안의 하이드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어쩌면 하이드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어터슨의 마음속엔 지금의 ‘사이버 레커’ 같은 속성도 숨어 있는 것이다.

최정원 역시 “19세기 원작이지만 현대의 우리가 이 안에 있다”고 했다. “고상한 지킬인 척 살아가지만 뒤에서는 서로를 물어뜯는 하이드 같은 모습들을 현실에서도 보게 되잖아요. 모든 게 너무 무섭고 하이드를 실제로 만나면 미쳐버릴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하이드를 만나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는.”

공연은 내달 6일까지, 4만4000~6만6000원.

☞1인극 ‘지킬앤하이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1886)를 영국 극작가 게리 맥네어가 1인극으로 재해석한 연극. 지난해 1월 에든버러 초연 뒤 3월 국내 초연이 개막했다. 오랜 친구 지킬의 기이한 행적에 의문을 품고 정체불명의 인물 하이드를 추적하는 변호사 어터슨을 시작으로, 지킬의 주변 인물 최소 8인을 ‘퍼포머’ 배우 한 사람이 모두 표현한다.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배우 최정원, 고훈정, 백석광, 강기둥이 번갈아 무대에 선다.